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辭典)

by 어슴푸레

직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단어 선택에서 한 번쯤 고민하게 된다. '사전 편찬가'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한 거 같고, '사전 편집자'라고 하기엔 포토샵 등의 도구를 사용하거나 기술을 활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해요."라거나 "국어사전 개정 일을 하고 있어요."라고 담백하게 대답한다. 그 순간 상대의 눈에 반짝하고 호기심이 뜬다. 불과 11~13음절의 건조한 대답에 일면식도 없는 사이를 한순간 '알고 싶은 사이'로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경험적으로 안다. 이후 업무 외적으로 '인간 박OO'에 대한 질문이 줄을 잇기 때문이다.


나는 편찬 사업을 '맡아' 하지 않으며, 사전의 잘못된 부분을 '임의'로 '판단'하거나 '절차 없이' 고치지 않으므로 원칙적으로 '사전 편찬가'와 '사전 개정자(?)'는 아닌 셈이다. 그러면 18년 남짓, 사전에 오를 말을 정하고, 집필하고, 감수하고, 개정해 온 나를 뭐라 이름해야 할까. <오픈 사전 Pro>에 누군가 '사전 편찬자'를 '사전 표제어의 발음, 어원, 형태, 의미, 용법 따위를 일정한 기준에 따라 집필하는 사람.'으로 올려놓았다. 그래, '사전 편찬가'보다는 조금 가볍고 내가 하는 일 대부분이 저기에 속하니 '사전 편찬자'가 맞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뭔가 2% 부족한 느낌이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부분을, 그 지점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직면하는 순간 두 발 밑에서는 피가 철철 흐른다.


매일 떨어지는 꿈을 꾸고, 매일 떨어졌을 때와 붙었을 때를 시뮬레이션하며 다시 한 달여를 준비했다. 이번에도 대역전극(?)은 일어나지 않았고, '왜 그들은 되고 늘 나는 아닌가.'에 생각이 미칠 때면 문전에서 내동댕이쳐진 기분에 분노가 일고 급기야는 무감각의 상태가 지속되기도 했다. 처음엔 학비가 목적이었고, 결혼 이후에는 생계가 목적이었던 '밥벌이'로서의 일이라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무겁고 치사해 밥이 먹기 싫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힘을 내야만 했다. 지금 당장 문 닫고 나갈 것이 아니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동안, 어쩌면 또 오랫동안 이곳에서 '사전 밥'을 먹을 사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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