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뭉치 텍스트를 불러들이기 위해 한글 프로그램의 연동을 기다리고 있자면 천천히 색인이 되어 가는 단어의 쓰임에 짐짓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단 몇 줄에 불과한 문장이지만, 10년에서 100년이 넘는, 쉬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월의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비밀스럽고도 고집스럽게 말의 역사를 압축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그 낱낱의 문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텍스트 하나하나가 “나는 처음에 이렇게 쓰였어.” 혹은 “나는 이렇게 뜻이 변하고 있는 중이야,”, “내 몸에는 반골의 피가 흐르는 서자의 그것과 같이 정반대의 뜻이 들끓고 있어.” 하고 나에게 쉴 새 없이 말을 거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삶이 그렇듯이 말이라는 것도 크게 변하지 않는 선에서 비유와 확장을 오가며 그 나름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대개의 텍스트는 고여 있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때때로 삐딱한 시선으로 인식의 전복을 꾀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동안 네 삶의 말뭉치에는 어떤 말들을 주로 구축했느냐’, ‘그 말들은 방어적이냐, 전투적이냐.’, ‘계속해서 그와 같은 태도를 유지할 것이냐’, ‘조금씩이라도 바꾸겠다면 무엇으로 첫삽을 뜨겠느냐.’, ‘육십쯤 되면 서로 충돌하는 삶의 태도를 슬기롭게 조율할 그릇이 돼 있을 수 있겠느냐….’
그때마다 흔쾌히 대답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살아 내기에 ‘삶’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쨌거나 ‘살아’ 보는 수밖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말이라는 것도 그러지 않았을까. 100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자신의 의미가 지금처럼 굳어져 있을지는 확신 못하지 않았을까. 비록 강수 확률과도 같이 그날그날의 사용 빈도를 겪으며 ‘종내에는 아마도 이렇게 되겠지.’ 하고 짐작은 했을지라도.
그러므로 말이건, 삶이건 결국 무엇을 가장 고민했는지가 응집되기 마련인 것이다. 그 고민의 결과가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그래서 그 열매를 얼마나 아름답게 거둘지는 오직 오늘을 사는 자세에서 결정될 것이다. 사람이나 곡식이나 씨알도 중요하지만 그것의 마지막 추수가 가장 중요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