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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9시간전

철학적 진료

                        


친정집 가까운 곳에 아빠의 지인, 박원장님이 운영하시는 작은 동네 병원이 있다.

'박내과 의원'이라는 간판이 달려있기는 하지만 내과,소아과 ,피부과,가정의학과, 심지어 동네 어르신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공감의 맞장구를 치거나, 함께 울화통을 터트리기도 하는 '신경정신과' 의 역할까지... 그야말로 '일당백의 종합병원'이다.


명동 한복판, 대로변의 대형 종합병원 대표원장 자리를 마다하고 변두리 동네의 작은 의원에서 동네 어르신들의 주치의 역할을 자처한 건, 그저 낮은 곳에서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환자 한명이라도 더 돌보는 것을 직업적 소명이자 삶의 보람으로 여기는 박원장님의 신념에 따른 선택이었다.


나이가 들면 연비 떨어져 녹슬어가는 자동차처럼 여기저기 아프고 고장나기 마련이다. 딱히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는 말도 없이 다짜고짜, 여기저기 쑤시고 결린다, 으실으실 오한이 나고 매가리가 없다, 소화가 안되고 더부룩 답답하다, 홧병인가 싶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갑자기 머리 꼭대기까지 열이 훅! 치솟는다 등등.. 만병통치 호랑이약 구하듯, 한나라 화타를 알현하듯 박내과를 찾아오는 어르신들에게 박선생님은 한분 한분 진심을 다한다.  시시콜콜 이야기 들어주고, 진단하고 치료하는 한편,  단백질이 많은 음식을 드셔라, 너무 새벽같이 일어나지 말고 잠을 충분히 주무셔라, 물을 천천히 자주 많이 마셔라, 사소한 일에 근심 걱정하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 등등 생활습관, 식습관 관리에 심리 상담까지 해주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 환자 세 명은 볼 시간에 한 명 밖에 못보는 일이 허다하고, 따라서 기다리는 시간도 길어져 환자들이 불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그런 불만을 하는 환자는 거의 이 병원에 처음 온 환자들이거나, 혹은 사는게 분주하여 늘 시간이 모자란 동네 젊은 엄마들 정도이고, 박선생님의 오랜 단골들은 어차피 본인도 선생님을 꽃본 듯 오래 붙들고 있을 작정이라 그런지 별 군소리들을 안하시는 것 같았다.


장거리 여행을 간 엄마, 아빠가 혼자 집에 계신 할머니가 걱정되서 전화를 여러번 해도 받질 않고, 나도 동생도 직장에 있어 발만 동동 굴러야 했을때, 기꺼이 우리집에 들러 할머니의 안부를 전해주신 것도 박원장님이었다. 지난 몇년간 이런저런 험한 일들을 겪으며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피골이 상접한 채 시커매지는 나를, 엄마는 박내과로 끌고가 수액을 맞게 하셨다. 먹는 것도 귀찮고, 먹을 의지도 없던 내게 주사바늘 꽂아 포도당이라도 먹고 가라하던 그날도, 박선생님은 눈도 안맞추고 대답도 잘 안하는 퉁명스런 나를 앉혀놓고, 단백질이 풍부한 음식과 요리 레시피까지 알려주시며 이런저런 말을 시킨 끝에 처방전을 써주듯 한마디 덧붙이셨다.

"엄마,아빠가 걱정을...많이 하십니다..."

종이 대신 마음에 써주신 그 처방전을 받고 바로 병이 나은 건 아니었지만, 효과가 있었는지, 적어도... 두번째 수액을 맞으러 때는 엄마 손에 끌려서가 아니라 내 발로 가긴 했었다.

 



몇칠전부터 코를 훌쩍거리던 장초딩. 학원에 가기 전에 할머니 집  박내과에 들렀다 가자고 했더니 하는 말.


"엄마, 나 박샘 병원 안갈꺼야."

"응? 왜? 할머니 집 바로 앞이고 학원도 가까우니 들렀다 가기 좋잖아,"

"거긴 진료가 너무 철학적이야. 목 아프다하면 뜨거운 물 마시고 잠 푹 자래."

 

'철학적 진료' 라는 말을 듣는 순간 큭. 웃음이  나왔다. 생활 습관과 섭생을 건강의 우선으로 강조하시는 선생님은 항생제등의 센 약을 잘 처방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다른 병원에서 준 약이면 하루면 나을 감기가 잘 안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더디 회복되더라도 몸 전체의 균형을 더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 같은데, 콧물 질질 증상으로 감기약을 몇번 받아온 녀석은 약을 먹어도 콧물이 쑥 들어가질 않으니 불편했나 보다.


그런데, 이 녀석 표현 보게.. '진료가 철학적이야'라니... 제법인걸? 선생님의 진료 방식과 소신, 병원의 상황과 환자들의 모습 등을 한큐에 꿰뚫어 본, 그러면서도 감기가 잘 낫지 않는 것이 의사샘의 소양 부족이 아니라 오히려 의학적인 영역을 넘어선 더 근본적인 본질의 추구임을 알고 있는 듯한 녀석의 '명쾌한 명명'에 웃음이 나온 한편으로 감탄을 했다.

'자슥...덤벙덤벙 헬렐레~한 줄만 알았는데, 사리분별이 빠릿~하구만.'


실손보험 받는 방법까지 알려주며 비급여 항목의 진료를 유도하는 과잉진료로 병원의 배를 불리는 의원들이 흔한 요즘에, 휴먼 다큐에나 나올 법한 '진심을 처방하는 의원'을 운영하는 박원장님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줄 알았던 '낭만 닥터' 라고 해야할까.  


'돈많이 버는 직업'인 의사가 전국의 모든 학부모와 학생들의 '장래 희망'이 되어 '초등 의대반'이 버젓이 성행하는 이 물질 만능 시대에, 환자 머릿수가 곧 병원의 수익이 되는 이 치열한 의료 경쟁 시대에, <의학적(이기만 한) 진료>가 난무하는 이 삭막한 시대에,  '히포크라스' 정신에 입각하여  '소크라테스'같은 진료를 펼치는  '이상한 병원' 박내과.


 오늘도 박선생님은 환자들에게 다정하게 묻늗다.

"어머니, 잠은 잘 잤어요?식사는 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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