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이쁜이는 작은 얼굴에 큰 눈망울, 오똑한 코가 오밀조밀 참 예쁜 아이다. 웃음도 많고 애교도 많고 조잘조잘 하고 싶은 말도 늘 많은 이쁜이지만 막상 수업이 시작되면 초롱초롱하던 눈동자에 초점이 흔들리며 점점 흐릿해지기 일쑤이다.
아이가 수업 내용을 이해를 하고 있는지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쁜이는 단어나 짧은 문장 등은 곧잘 외워오지만, 책을 읽고 해석을 하거나 문법 개념을 설명할 때면, 맑개 개었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듯 맑고 산뜻했던 표정이 어둡고 흐릿하게 변해갔다. 방금 설명한 내용을 다시 물어도 기억을 하지 못했고, 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똑같은 오답을 쓰는 경우도 많았다.
동사의 과거시제에 대한 설명을 하는 시간이었다. 영어 동사의 과거시제는 규칙변화 외에도 불규칙 변화가 많아서 영어를 처음 접하는 아이들은 단어 암기를 힘들어한다. 그래서 조금씩 나누어 단어를 외우게 하고 쪽지 시험을 보곤 하는데, 이쁜이는 과거형 동사 암기 시험은 그닥 어려워하지 않았다.문제는 과거형 동사를 활용해서 문장을 해석하거나 영작하는 것을 전혀 못한다는 것이었다. 딱히 개념 이해가 어려운 문법 내용도 아니고 과거형 단어의 철자를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이 아이가 대체 왜 이럴까?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도 답답해서
"이쁜아. 이미 지난 일이잖아. 과거시간이라고."
하며 아이의 얼굴을 보니 여전히 흐리멍텅.... 혹시나 해서 물었다.
"혹시 '과거'가 무슨 뜻인지 알아?"
멍한 표정을 짓는 이쁜이를 보고 아차! 싶었다. '과거'의 뜻도 모르는 아이에게 영어동사 과거 시제를 설명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오히려 간신히 외워놓은 단어의 뜻마저 흔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안그래도 흐린 날씨에 짙은 안개 속을 헤메고 있었겠구나.... 안타까우면서도 초등학교 5학년인 학생이 '과거'란 단어의 뜻을 모른다는게 말이 되나 싶었다. 내 기준이 높은건가.
'금일'을 금요일로, '심심한 사과'는 맛없는 사과로,'기업 존망'을 기업이 '존나(좇나) 망했네' 로 알고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요즘 아이들 외국인이나 다를 바 없다는 건, 현장에서 수업을 하면서, 여러 매체의 기사등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이쁜이의 경우는 좀 심각한 편이었다. 그 다음 시간에 영어 지문 해석을 하며 할아버지, 할머니에 관한 글이 나와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이쁜이는 외할머니와 친할머니의 단어의 차이도 잘 모르고 있었다. 이쁜이는 내년이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데 말이다.
고민 끝에 어머니께 상담전화를 드렸다. 아이의 부족함에 대해 말하는 건 늘 조심스럽다. 더구나 초등학교 시절은 아직 내 아이의 무한 가능성에 대한 엄마의 기대치가 최고로 높은 시기가 아닌가. 아이의 부족함은 내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선생님의 무능력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머니, 이쁜이가 벌써 초등학교 5학년인데, 또래 평균보다 단어 이해력이 좀 부족합니다 앞으로 교과서에서 다루는 단어의 수준도 점점 높아지기 때문에 학교 수업을 잘 따라가기 위해서는 단어 공부를 좀 해야합니다. 영어 단어보다 더 중요한 게 우리말 단어이니 책을 많이 읽게 하시고 국어사전 찾는 습관도 지금부터라도 갖게 하면 좋겠습니다."
최대한 오해가 없도록 기분 상하지 않도록 돌려서 말씀드렸는데도, 이쁜이 엄마는 자기 아이가 '과거' 의 뜻도 모르고 '외할머니','친할머니'도 헷갈려 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어머니는 알려주셔서 감사하다고 했고. 나 역시 학원에서도 노력하겠다고 하고 상담 전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날, 이쁜이가 피곤한 얼굴로 교실에 들어왔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힘들어보여? 물었더니. 영어 학원에 오기 직전에 학원에 다녀오느라 바빴다고 한다. 무슨 학원엘 또 다녀왔어? 물으니...
"엄마가요. 제가 단어를 너무 모른다고 한자 학원에 등록했어요."
"...... ....... ......"
후우...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내가 괜한 소릴 해서 이쁜이 학원만 하나 더 늘었다. 미안하네...
그러고 보니 이쁜이가 단어 실력이 형편없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엄마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책을 많이 읽게 하세요'를 '한자 학원에 보내세요' 로 이해하다니. 문해력 빵점이다.
어머님들.제발...
학원은 돈을 내고 아이를 넣으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던져주는 자판기가 아닙니다. 학원 자판기 안에서 아이들은 이리저리 부딪치다가 결국 망가진 모양으로 나올 확률이 훨씬 높아요.
제발!!!! 돈만 주면 학원에서 알아서 우리 아이 실력을 키워주겠지 착각하고 영어 자판기, 수학 자판기, 국어 자판기 찾아다니지 마시고, 아이들에게 진짜 뭐가 필요한지, 내 아이의 상태를 먼저 봐주세요.
자판기에서 원하는 물건이 제대로 나오는 경우는, 자판기가 잘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그 물건 자체가 내가 원했던 물건이기 때문이니까요. 포도 쥬스를 누르고 오렌지 쥬스가 나오길 기대하면 안됩니다.
아... 답답허다... 증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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