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계절> by 이 용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잊을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https://youtu.be/AvW7-IQQ5s4?si=-gdIjFL8MlDCz9ki
해마다 10월 31일이면 들어야만 할 것 같은 노래.
가수 이 용의 '잊혀진 계절'
무려 1982년에 출시된 노래가 아직도 해마다 어김없이 기억되고 불리워지는 걸 보면, 음악은 어쩌면 영화나 글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농밀하게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듯 하다. 순식간에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마법의 버튼같은.
2012년生 장초딩에게도 10월 31일은 일년 중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다. 8월 말쯤 되면 이미 10월 31일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왈랑거리기 시작하고, 아직 열대야가 채 가시기도 전부터 찬바람 불기를 오매불망 기다린다. 평소에 숙제하라고 하면 1분 단위로 들썩거리던 엉덩이에 딱풀이라도 붙인 듯 장장 몇시간을 붙이고 앉아 정성껏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작년 11월 1일부로 리셋된 <위시 리스트>를 정리하고,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엄마,아빠,삼촌,숙모,고모 기타 등등... 가족 구성원들에게 어떤 선물을 어떻게 배분해서 가장 알차게 받아낼까를 연구하는 것이다. 내가 널 낳았는데, 니가 나한테 선물을 줘야지, 먹이고, 입히고, 기르고,가르치고 그것도 모자라 선물까지 내놓으라는 거냐며, 나는 그 명단에서 빠진지 오래다.
결혼 8년 만에 나온 집안의 첫손주로 온 가족 사랑 듬뿍 받고 자라 매일이 생일인 녀석에게, 결핍의 소중함과 간절함을 가르치고 싶은 에미 맘을 녀석이 아랑곳하게 여길 리가 없다. 생일 선물을 받기는 커녕, 자기 생일이 언제인 줄도 모르고, 부모님 얼굴도 모르고 자라 생일날에도 뙤약볕에서 일을 해야하는 아이들이 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는 엄마의 설교가, 세상에 신기한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궁금한 것도 너무 많은 대한민국 초6인 장초딩에게 와 닿을리가 없다.그저... 부디 받은 사랑만큼 그 사랑을 세상에 돌려줄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기를 바라며, '그 명단에서 나는 빼라. 나는 너한테 이미 차고 넘치게 주었단다' 를 세뇌시키 듯 힘주어 말할 뿐.
여러가지 생각해 둔 선물 리스트 중에, 올해 장초딩이 가장 '찐하게 꽂혀버린 건'(장초딩의 표현), 3D프린터였다. 3D프린터라 하면 상업용으로 사용되는 수백~수천만원 나가는 값 비싼 것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요즘에는 기술이 발달해서 가정용 3D 프린터도 보급이 되나 보았다. 너무 비싸면 분명히 엄마가 안 사줄 걸 아니까 그동안 이 녀석, 나름 열심히 자료를 모으고 조사를 한 듯 했다. 찬찬히 들어보니, 가격은 약 30만원 정도. 30만원 짜리 3D프린터가 쓸 만한 결과물을 출력할 수 있을까 싶어 반신반의 했는데, 아이가 보여준 판매 사이트에 구매 후기가 500건이 넘고, 평가도 대체로 나쁘지 않았다. 자고나면 3D 프린터 노래를 부르는 녀석의 등쌀에 못이겨, 10월 중순은 넘겨라, 15일 지나면 미리 주문하게 해주마 허락을 했다. 그러나 30만원이라는 금액이 초등학생 생일 선물로는 과하다는 생각에, 여러가지 리스트 중에 다른 건 포기하고, 가족 구성원 모두의 후원을 합쳐 이번 생일은 가장 원하는 3D 프린터 한 개로 끝내기로 약속했다.
마침내, 장초딩이 달력에 '주문' 이라고 빨간 글씨로 써놓은 10월 15일이 되었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주문을 하겠다는 녀석을 어르고 달래, 일단 학교에 보내고 하루 일과를 마치게 한 후, 밤에 다시 모여 주문에 성공했다. 얼마나 학수고대, 오매불망 기다리는지. 이미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걸 알아버린 녀석이지만, 아직 산타 할배를 믿었을 때의 다섯 살 그 시절 설렘에 비할까. 그 후로 몇칠간 아침에 눈 뜨자마자 현관문으로 달려나가 큰 박스가 와있는지 확인했지만, 번번히 그 전날 저녁 엄마가 시킨, 우유나,야채,휴지 등등의 쿠팡 새벽 배송인 걸 알고 실망하기를 여러번 반복했다.
그리고, 지난 주였나. 퇴근이 늦어져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집에 와보니 급하게 뜯은 박스, 스티로폼 등으로 온통 집안이 난장판이 되어있고, 그걸 깔고 앉은 장초딩은 우주 탐사라도 떠날 기세로 설명서를 펴놓고 진지하게 3D 프린터에 몰두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숙제 마치고 책 읽다가 자러 가라고 하면, 10시만 되어도 졸려 죽겠다고 하품 연기를 하던 녀석이 11시를 훌쩍 넘긴 시간까지 눈빛이 초롱초롱 한 채, 가볍기 그지없는 엉덩이에 여지없이 딱풀을 붙인 듯 앉아있었다. 먼저 귀가한 남편 말에 따르면 벌써 2시간째 꼼짝앉고 저러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날 아이는 결국 출력물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2-3일간을 종이 설명서와 유튜브 설명 영상과 씨름을 하더니, 대략 1시간 정도 3D 프린터가 쓰윽쓱~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드디어 아주 작은 형체 하나를 출력해냈다. 손오공 얼굴같기도, 크게 웃는 도라에몽 같기도 한 엄지손가락 반만한 졍체불명의 작은 피규어 인형. 그렇게 프린터가 집에 온 후 3일만에 장초딩의 첫 작품이 완성되었다. 프린터라고 하면 종이에 출력되는 2D 밖에 모르는 내게, 비록 작긴 해도 입체적인 어떤 물건이 프린터를 사용해 '출력'된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해서, 아이가 자러 간 후에도 손오공 머리같이 생긴 작은 물체를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다음날, 수업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집에 오니, 장초딩은 꼼짝 앉고 3D 프린터 앞에 앉아 있었다. 무얼 하고 있니 물으니, 대답없이 쓰윽쓰윽 움직이는 프린터를 손으로 가리킨다. 가만보니, 어제의 움직임과는 뭔가가 달랐다. 마치 자동차 헛바퀴 돌 듯, 프린터에 달린 작은 판 같은 물체가 제자리를 오르락 내리락하기만 반복하고 있었다. "엄마, 이거 정상이 아니야. Z축 나사 자체가 올라갔다가 갑자기 뚝!하고 내려오기를 반복하기만 해" 아이의 설명을 들어봐야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확실한 건, 엄지손가락 반만한 손오공 머리 피규어를 하나 뱉어낸 것을 끝으로, 3D 프린터는 고장난 LP판 바늘처럼 제자리에서 튀고만 있다는 거였다. 남편이 전하기론, 벌써 2시간째 꼼짝앉고 들어앉아 이리저리 연구를 했다는데, 결국 작동이 안되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기계의 30만원 짜리 버전을 샀는데, '싼 게 비지떡' 이라고 하기엔 30만원은 큰 돈이지만, 애초에 큰 기대를 할 말한 수준의 물건이 아니었나보다. 울상이 된 녀석과 함께 구매했던 사이트에 들어가 AS접수를 하고, 일단 수리를 받아보고 다시 한번 해보자 달랬다.
침대에 누운 아이가 말이 없다. 잠드는 순간까지 귀가 따갑도록 시끄럽게 조잘거리는 녀석이 세상이 무너진 듯 침울한 표정으로 가만히 똑바로 누워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AS 접수했으니 연락이 올거야. 기다려보자. 아직까지 3D 프린터를 집에서 쓰기에는 기술이 덜 발달된 것 같아 그치?"
"엄마,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야, 너...진짜 속상한가 보구나..."
"나, 지금... 슬픔을 출력하는 중이야. 말시키지 마요."
"... .... ...."
"그... 그래, 고해상도로 출력하고 있구나...."
그 와중에 '슬픔을 출력하는 중' 이라는 녀석의 표현에 반해버리고 만 에미. 그래..엄마도 있지, 슬픔, 분노, 후회, 자책, 미움 등등의 감정을 남김없이 다 출력해서 커다란 쓰레기통에 다 버리고 싶다. 정말 그런 출력기가 있으면 참 좋을텐데 그지? 너무 실망하지 말고 잘 고쳐서 다시 멋진 작품 만들어보자.
아들아, 살다보면 기대를 많이 한 일 일수록, 뜻대로 안되거나 실패하는 일이 많단다. 그럴 때 중요한 건, 뜻대로 안된다고 짜증내거나. 되는 일이 없다고 화를 내거나, 기가 죽지도 풀이 죽지도 말고, 안되면 되게 하는 방법을 찾아 다시 해보는 태도야. 실은, 엄마도 그게 참 어렵기는 해. 기대한 일이 잘 안되서 실망하고 자책하고 후회도 하고. 그러다가 영 맥이 빠져서 다시 해 볼 생각도 안하고 포기한 적도 많아. 그렇지만, 멈추지 말고 다시 하다보면 시간이 좀 걸려도, 반드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거야. 포기하지만 않으면 여러 번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가는 과정이란다. 네가 너무나 바랬던 이 선물을 통해 이걸 배운다면, 아마 너의 13살 인생의 최고의 선물이 될꺼야.
잘 자라주고 있어서 고마워.
사랑한다 아들. 생일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