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소중한 물건
도심의 주말 카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볕이 잘 들고 경치가 좋은 창가의 자리와 편안한 의자가 배치된 좌석은 이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런 시간에는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어 대화에 집중하기 어려운 통로 옆 자리라도 감지덕지다. 어떤 날은 사람이 너무 많아 음료를 들고 빈자리가 생기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카페 안을 주욱 훑어보면 사람은 없지만 책이나 랩탑, 휴대전화기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자리가 있다. 음료를 주문하거나 받으러 간 사람, 화장실에 간 사람, 급한 용무가 생긴 사람의 빈자리다. 사람이 붐비는 시간에는 그런 자리가 아쉽다. 다행히도 배려와 양보의 미덕을 갖춘 센스 있는 사람들이 다 마신 음료를 정리하고 자리를 비워준다. 감사의 눈 맞춤과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아 주말의 여유를 만끽하며 동행한 사람과 이야기꽃을 피운다.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카페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그들은 빈자리가 생기기를 기다린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은 앉아 있지 않지만 물건이 놓인 자리가 꽤 눈에 띈다. 아무도 그런 자리에 가서 앉지 않을뿐더러 함부로 타인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집 근처에는 작은 공원이 있다. 주택단지를 조성하면서 만든 작은 공원은 산책로와 작은 쉼터로 구성되어 있다. 아파트단지 사이에 낀 작은 개울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했기 때문에 드넓은 잔디밭도 없고 그늘막을 설치할 만큼 즐길거리가 많은 곳도 아니다. 동네 주민들이 오가며 벤치에 앉아 잠시 쉬거나 반려동물을 산책시키는 정도로만 이용되고 있다. 작은 개울은 공원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흐르는데 주변의 높지 않은 산에서 시작한 물줄기이다 보니 수량이 적어 사람 키만 한 너비에 발목 정도의 깊이로 얕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메마른 개울 바닥이 자주 드러난다. 처음에는 바닥을 흙으로 만들어 자연수로를 조성하였으나, 쌓이는 흙과 자라나는 무성한 풀 때문에 관리가 어렵고 날벌레의 출현으로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하자 결국 바닥을 시멘트로 마감했다. 주변의 아파트단지와 중학교를 가로지르는 붉은 벽돌길을 통과하면 또 다른 주택가의 작은 공원과 연결되는데, 그곳까지 왕복하며 달리기를 하기 딱 좋아 이 공원을 자주 찾는다. 그런데 공원을 이용하면서 며칠이고 방치된 주인 잃은 어린이 자전거와 킥보드를 자주 목격한다.
어느 날은 자전거 하나가 산책로에 세워져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가 타고 다닐만한 자전거로 보였는데 분홍색 바탕에 귀여운 동물 캐릭터가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녹슨 곳 하나 없이 관리된 자전거였다. 어떤 아이가 공원에 자전거를 타고 놀러 왔다가 두고 갔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기에 공원까지 몰고 온 자전거를 잊고 집으로 돌아갔을지부터 행여 급한 일로 자전거를 두고 어딘가를 가야 했었는지까지 여러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유치원생 정도는 자전거를 잊고 집에 돌아갔을 수 있다고 여겼지만 초등학생이 그렇게 큰 자기의 물건을 잊고 집에 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자전거를 두고 자리를 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발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니 부모님께 야단을 맞거나 나중에라도 자전거를 두고 온 기억이 불현듯 나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 자전거는 며칠이 지나도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산책로를 차지하고 있던 자전거를 누군가 옆으로 옮겨 놓았다 뿐이지 여전히 위치는 그대로였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자전거는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보름이 지나서 발견된 자전거는 안장과 바퀴 한 개가 빠진 채 개울에 처박혀 있었다. 누군가의 소중한 자전거가 훼손되어 고꾸라져 있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비단 그 자전거 하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원에는 또다시 주인을 잃은 킥보드가 등장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다니는 어린아이의 킥보드였는데 산책로 옆 풀밭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킥보드는 바퀴가 두 개 밖에 달리지 않은 모델이어서 세워 놓을 수가 없었다. 킥보드 또한 아이가 잠시 공원에 놀러 왔다가 킥보드의 존재를 잊은 채 두고 갔거나 급한 용무로 잠시 방치해 놓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킥보드는 한동안 같은 자리에 누워있었다.
주인을 잃은 물건들은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휴대전화나 랩탑 등 값비싼 물건이 분실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일은 매우 나쁘다는 것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배운다. 특히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이 같은 가정교육은 절대적 영역을 차지하며 일상생활 속에서 자주 이루어진다. 학교와 사회에서도 도덕과 예절을 중요시하여 가르치고 있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양심적인 문제에 관해서도 제법 엄격한 삶의 기준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어른을 공경하는 태도와 질서를 지켜 줄을 서는 것 등 우리나라에 대한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은 허투루 나온 말이 아니다.
이런 도덕적인 자부심 속에서도 은연중에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치부가 있다. 건강한 사회라는 견고하고 두꺼우며 아름다운 무늬의 갑피를 완전히 부수어 속살을 까발리자면 우리 스스로 느끼기에도 부끄러운 사회의 단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중 하나가 자전거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학창 시절에는 잠금장치를 하지 않은 자전거를 상습적으로 훔친 친구가 있었는데 대놓고 다른 친구에게 자전거를 헐값에 팔면서 용돈을 충당했다. 여러 친구들은 자전거를 싼 값으로 사고 싶은 마음에 그 친구와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몇몇 친구들은 자전거를 훔쳤다는 도덕적인 부분을 문제 삼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얼마 되지 않는 수중의 돈으로 자전거를 장만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에 쉽게 빠져든 것 같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훔친 자전거로 벌어들이는 돈을 부러워한 적이 있으며 가격을 물어보기도 했다. 항간의 소문에는 그 친구가 자물쇠까지 파손하여 자전거를 훔치다가 적발되어 아주 곤란한 상황을 겪었다고도 했다.
어느 날 아침, 교복을 입은 중학생이 자전거를 타면서 비탈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딱 봐도 자전거는 중학생이 가랑이를 최대한 벌리고 무릎을 구부려야 겨우 페달을 밟을 수 있는 작은 자전거였다. 내 자전거도 아니지만 정면에서 두 손을 뻗어 아이를 불러 세웠다. 아이는 자전거를 세우고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 중학생이니?"
"네."
"이 자전거 누구거니?"
아이는 머뭇거리더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디 있던 자전거야?"
"... 길에 있던 자전거예요."
아이에게 무조건 친절할 수만은 없어서 교복 이름표를 보고 아저씨가 학교와 이름도 알고 있으니 자전거를 원래 위치에 가져다 놓으라고 말했다. 표정은 단호했지만 말은 충분히 친절했다. 아이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죄송하다며 알겠다고 말하고는 자전거에서 내려 내려온 반대 방향으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또 한 번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덩치가 매우 큰 학생이 유치원생이나 탈법한 분홍색 킥보드를 타고 인도를 활주 했다. 순식간에 내 곁을 쌩 지나친 아이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킥보드 조합의 뒷모습에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과연 저 킥보드는 저 아이의 물건일까? 물론 세워서 묻지 않았지만 그것이 그 아이의 물건이 아닐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이 작은 킥보드를 쪼그려 타고 이동하더니 인도에 킥보드를 그냥 세워 놓고 자리를 유유히 떠나버렸다. 자기 물건이라면 절대로 아무 곳에나 방치해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세종시의 자전거와 킥보드 절도로 검거된 피의자의 80%가 10대 청소년이며(2023년) 도난 신고를 하지 않는 비율도 상당하기 때문에 더 많은 아이들이 손쉽게 범죄를 저지른다고 판단할 수 있다. 비싸지 않은 물건에 대한 낮은 경각심과 충동 조절 능력의 부족, 과거에 비해 이웃 간의 연대감이나 거리 감시가 약해진 현대 사회에서의 청소년 비행을 제지해 줄 어른의 눈이 줄어든 요인, 청소년 보호법 등으로 인해 처벌이 미미하거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는 경우, 또래 집단 내에서 무모한 행동에 대한 허세 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아이들의 이런 특성을 이해하고 기다리는 일로 끝내면 안 된다.
건강한 공동체의 구심점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구성원, 즉 어른이어야 하지 않을까? 책임감 있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올바른 태도를 물려주어야 한다. 아이들의 부모가 알아서 키우겠지라는 방관자적인 태도로 일관하면 안 된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미성숙함을 달래고 타이를 수 있는 어른이 많아야 한다.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어른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이다.
"친구야, 그 물건은 네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났니?"라고 묻기 위해 주변에 관심을 갖고 자신이 사회의 책임감 있는 구성원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행동하는 어른이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