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설이 난무하는 놀이터
"병신새끼야."
순간 나의 귀를 의심했다. 날카롭게 울린 말의 뜻과 목소리, 장소의 부조화가 너무 심해 어안이 벙벙해졌다. 오후의 여유를 즐기고 있던 차였는데, 누군가 거대하고 고약한 오물을 투척하여 평온하던 나의 마음을 한순간에 무너뜨렸고 오물로 뒤덮인 마음은 불쾌한 악취를 풍기며 출렁였다. 평온함이 어그러진건 순식간이었다.
점심때가 막 지난 한낮의 시간이었다. 으레 그렇듯 이른 하오의 시간은 포근한 햇살에 나른함이 가득 담겨 내려앉는다. 햇살이 창가에 내려앉으면 수증기가 증발하듯 나른함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공간을 가득 메운다. 나른한 기운은 빈틈없이 공간을 가득 채우면서 그곳에 머무는 모든 사람의 피부에 계속 스며든다. 의자에 앉아 나른함에 취한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크고 작게 하품을 한다. 한껏 추켜올렸던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뻣뻣하게 쳐들었던 고개도 익어가는 벼처럼 고개를 숙인다. 나른함이란 전염병과도 같아서 한 사람이 나른함을 가득 채워 몽롱한 상태가 되면 이상하게도 주변의 다른 사람까지 몽롱해지는 기분이 든다. 나른함이 물밀듯 쏟아져 내려오는 한낮의 시간에 벌어지는 정신의 혈투는 얼마나 애처롭단 말인가? 딱히 나른함에 대적하며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른함에 점령당한 몽롱함이 그다지 나쁜 느낌은 아닐뿐더러 완패의 결과는 달콤한 낮잠일 뿐이니 누가 마다하지 않겠는가? 다만 나른함과 혈투를 벌여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일터이기에 아쉬움이 남을 따름이다.
다행히도 한가한 주말의 점심때가 막 지난 시간이었다. 봄 햇살이 거실에 큰 무늬를 새기고 있었고 동시에 나른함은 거실 구석구석 가득 퍼져 나의 정신을 희롱했다.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낮잠으로 소비할 수 없다는 의지 하나로 겨우 버티다가 산책을 나서기로 결심했다.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기며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양지바른 놀이터 앞의 벤치를 발견했다. 적당한 신체 활동으로 개운해진 정신과 다르게 다리는 조금 아팠기 때문에 벤치에 앉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따뜻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큰 소리의 욕설에 깜짝 놀란 것이다.
어른이 아닌 앳된 목소리가 나의 고막을 울렸다. 귀에서 감지된 소리의 자극이 순식간에 뇌로 이동하여 그 소리가 욕설임 파악했다. 심지어 욕설이 튀어나온 곳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공간, 놀이터였다. 아이들을 위한 공간에서 어떤 몰염치한 사람이 욕설을 내뱉는가 화도 나고 당황스러웠다. 더군다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른이 아니었다.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와중에도 욕은 속사포처럼 누군가의 입에서 발사되었다.
놀이터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사내아이 여섯 명이 모여 있었다. 여섯 명의 아이 중 입에 담기 힘든 심한 욕을 큰 소리로 외친 아이를 애써 찾을 필요는 없었다. 한 아이가 연이어 욕설을 내뱉으며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웃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싸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러 아이들이 욕을 한 아이의 자전거를 가리키며 킥킥대고 있었기 때문에 놀림의 대상이 된 아이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웃고 있는 아이들의 대화는 계속 욕이 섞여 이어졌다. 아이들은 욕을 빼면 대화를 할 수 없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친구를 새끼로 지칭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욕 경쟁이라도 붙은 듯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를 동물의 새끼로 부르거나 성적인 표현(아마 아이들은 정확한 의미도 알지 못하면서 사용하는 듯하다)도 빠지지 않았다.
어른이 자신들의 주변에 있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욕설에 상당히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들의 대화 속에 욕설이 심각하다는 다큐멘터리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꼭 놀이터뿐만이 아니었다.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의 대화 속에서 욕설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중요치 않았다.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욕설을 섞어 대화를 주고받았다. 주변에 누가 있던지 상관없어 보였다. 꽃봉오리처럼 싱그럽고 아름다운 아이들의 입에서 혐오스러운 욕설이 장소불문하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현상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아이들의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는지, 바로잡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틀림없이 가정과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언어습관을 바르게 잡아 주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도대체 아이들은 어디서 저런 욕설을 배우고 익힐까? 욕설의 사용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거나 품격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서로가 하지 않는 것일까? 혀끝에서 발사된 욕설을 통해 모종의 권력감이나 우월감을 느끼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것일까? 미성숙한 정신과 부족한 표현력이 욕설을 의사소통의 도구로 인식하게 한 것일까?
아이들을 불러서 바른말을 사용하라고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지 몹시 고민했다. 내가 그렇게 아이들에게 말하면 아이들은 부모도 선생님도 아닌 사람의 이야기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크게 반성을 하고 앞으로는 그런 욕설을 사용하지 않을까? 고민만 하고 있던 찰나 놀이터에서 무료하게 욕설을 주고받던 아이들은 더 재미있는 장소로 가자는 제안을 한 친구의 말에 일제히 자전거를 타고 놀이터를 떠나갔다. 이제 놀이터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 몇 명만이 남게 되었다. 그 아이들도 분명 나처럼 욕설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어른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우리가 그런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걸까? 좋은 방법이 떠오르면 욕설로 대화하는 아이들을 마주쳤을 때 꼭 써보고 싶다.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공동체이기도 하며 조금 더 세상을 산 어른으로서 말이다.
출처: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