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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고통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by 타조

"삶은 고통이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 프리드리히 니체




고통 자체가 없는 행복을 위해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한 쇼펜하우어와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는 행복을 주장한 니체. 비록 고통에 대처하는 자세는 서로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삶의 행복을 이야기하며 고통에 집중했다.


칸트는 "인간은 물자체를 알 수 없고, 오직 현상만을 인식한다"라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인식론을 바탕으로 세계의 본질을 객관적 실체가 아닌 주관의 인식 작용 속에서 드러나는 현상으로 정의한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물자체)가 아니라 인식 주체(나)가 만들어낸 표상(현상 세계)이라고 말한다.


존재란 인식될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세계는 나의 의식에 나타난 형상들의 집합, 즉 표상의 세계이다.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표상이 아니라 맹목적인 생의 의지로 바라본다. 이 의지는 끝없이 욕망하고 결코 채워지지 않는 힘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결핍과 고통의 반복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사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욕망하는 한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고통의 근원: 욕망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고통스럽고, 욕망이 충족되면 곧 지루함이 찾아오며, 인간은 이 두 가지 사이를 평생 오가며 살아간다고 본다.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의 진자운동과 같다고 여긴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흔들리는 시계추와 같다."


구원의 길

쇼펜하우어는 이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날 길을 의지의 부정에서 찾는다. 욕망을 끊고, 이 세상의 의지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며, 예술·도덕·금욕을 통해 고통을 잠시나마 초월할 수 있다고 본다. 그에게 예술은 인간을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순수한 직관의 순간이다.


우리는 인생에서 너무 많은 것을 욕망하며 살기에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좋은 집과 멋진 차, 돈, 권력, 명예 등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지만 더 나은 삶과 비교하며 결핍을 느끼고 욕망하게 되는 것이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라고 했다. 더 나은 것에 대한 의지, 욕망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치열한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예술과 도덕, 금욕의 생활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평온과 행복을 느끼고, 그것의 소중함을 알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탐욕이나 금욕이라는 양극단이 아닌 적절한 삶의 균형감, 바쁜 일상에 쫓기더라도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고독의 시간이 가져다주는 선물일 것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jpg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1788-1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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