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덤들 사이를 거닐면서
하나씩 묘비명을 읽어본다.
한두 구절이지만
주의 깊게 읽으면 많은 얘기가 숨어 있다.
그들이 염려한 것이나
투쟁한 것이나 성취한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태어난 날과
죽은 날짜로 줄어들었다.
살아 있을 적에는
지위와 재물이 그들을 갈라놓았어도
죽고 나니
이곳에 나란히 누워 있다.
죽은 자들이 나의 참된 스승이다.
그들은 영원한 침묵으로 나를 가르친다.
죽음을 통해 더욱 생생해진 그들의 존재가
내 마음을 씻어 준다.
홀연히 나는
내 목숨이 어느 순간에 끝날 것을 본다.
내가 죽음과 그렇게 가까운 것을 보는 순간
즉시로 나는 내 생 안에서 자유로워진다.
남하고 다투거나 그들을 비평할 필요가 무엇인가.
무덤들 사이를 거닐며, 임어당(린위탕)
무덤이 자리 잡은 곳을 떠올려 본다. 생을 마친 자의 육신을 안치하여 그를 기억하고 그의 영혼을 기리는 곳. 심장의 박동과 신체의 온기는 삶과 생명의 증거이지만 멈춰버린 심장과 사라진 온기는 죽음의 증거가 된다. 아름답게 핀 장미의 잎이 촉촉하고 빨갛게 발색하여 싱그러운 자태를 뽐내는 모습이 생동감을 자아낸다면, 검붉은 색으로 푸석한 모습은 생의 끝을 떠올린다. 생과 사는 우리 삶의 시작과 끝, 한 몸이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이 모든 생의 소멸이라는 불편한 마음 때문에 죽음을 저 멀리 떼어 놓는다. 그래서 무덤은 인적이 드물고 음산하며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곳에 있다. 아니 무덤은 사실은 평범한 곳에 있지만 무덤이 있다는 사실이 그곳을 어둡게 만든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하여 묘지를 방문한 임어당은 삶과 죽음이 맞닿은 그곳에서 돌연 진정한 자유는 죽음을 마주했을 때 얻을 수 있다고 깨닫는다. 묘지에 묻힌 자의 삶은 이미 과거에만 존재할 뿐, 단지 묘비에 쓰인 기록으로 남았지만 그들의 죽음이 산 사람의 생에 큰 깨달음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고독한 시간의 사유를 통해 얻은 소중한 가치를 글로 남겨 우리에게 전한다.
죽음이 코앞에 있을 때,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으며 그 외의 것들은 관심 밖의 변두리로 밀려나 어느새 사라진다. 분노와 증오도 마찬가지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바탕으로 삶을 이야기할 때, 희망을 향한 여정을 방해하는 사람과 상황 등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고민과 고통을 안기지만, 더 이상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는 죽음과 마주하면 고민과 고통조차 무의미해진다.
안빈낙도. 나는 정신적인 만족이 죽음 앞에서조차 물러서지 않는 용감한 가치라고 느낀다.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상황보다 정신적인 숭고함과 평온함이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증오와 분노보다 사랑과 평화가 죽음 앞에서도 부끄러움 없는 삶의 가치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임어당(린위탕), 1895-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