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
"삶은 고통이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 프리드리히 니체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가진 생의 의지가 인간의 삶에 가장 큰 고통을 안긴다고 본다. 이 무슨 아이러니한 주장인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오히려 큰 고통을 안긴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음식을 섭취해야 하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며 몸을 보호해야 한다. 게다가 인간은 단순한 생물적 생존의 영역 외의 다양한 욕구를 지닌다. 보다 나은 생을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욕망하며, 결국 그로 인해 고통받는다. 그렇기에 그의 결론은 금욕적인 생활로 귀결된다.
그렇다고 쇼펜하우어의 이야기가 단순히 기본적 생명을 유지하는 수준의 금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극심한 고통에 빠지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수준으로 욕구를 조절하자는 의미이다. 현재의 자기 삶에 만족하면서 과욕을 경계하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이야기이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즉 소확행이라는 신조어와 과도한 업무에 대한 거부, 승진포기와 같은 사회적 현상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삶에 고통의 칼날을 겨누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욕망의 절제가 우리의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와 대척점에 선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니체다. 니체는 인간의 위대함은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그는 고통까지 포함하여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고통은 인간을 부수는 힘이 아니라, 인간을 단련시키고 창조적 존재로 만드는 불길이다. 그는 'Amor fati',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을 남겼다. 고통, 불행, 실수, 상처까지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 자체를 사랑하라는 의미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고 긴 시간을 인내하여 결국 싹트는 봄눈과 새싹처럼,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숨 막히는 열기를 견디며 맺힌 열매처럼, 고통을 통해서야 비로소 아름다운 결실을 이룰 수 있다는 니체. 어쩌면 우리가 부단히 노력하는 이유는 미래의 행복을 위한 인내의 힘을 믿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면서 받는 고통은 결국 보상을 받는다. 하지만 삶은 불공평하기 때문에 노력이 헛수고로 이어지기 일쑤다. 감수한 고통과 비례하여 행복이 찾아온다고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면 분명 고통을 겪은 만큼의 보상이 따를 것이라고.
쇼펜하우어는 고통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니체는 고통 속에서 춤추려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둘은 더 이상 고통을 떠올리지도, 고통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우리가 탄생한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평온한 고요에 싸여 있다. 죽음을 마주해야 비로소 삶이 방향이 명확해진다는 깨달음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고통의 절벽을 통과할 때 잠시 걸음을 멈추고 떠올려보자.
<프리드리히 니체, 1844-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