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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북부에 자리 잡고

Woodland Hills에서 미국을 배우고

by I am YS

IMF의 조짐을 감지하기도 훨씬도 전인 90년대 중반에, 주변 지인의 진심 어린 걱정과 조언(외국회사에 근무하며 한국에서 잘 지내다 왜 갑자기 이민을 가려하냐는)을 뒤로하고 아내와 돌이 아직 채 안된 딸과의 이민생활이 시작된다.


달러를 송금하려 하는데 내가 은행원에 제시한 H-1 비자(취업비자로 보통은 유학용 F-1이나 여행용 B 1/2 비자를 받아서 나갈 때였다)를 자신은 처음 본다며 송금을 거부당하고. 며칠을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간신히 차 한 대 살 정도만을 보내고 비행기에 올랐다.


대지진이 지나 정리도 채 안된 서너 달 후에 여기저기 갈라진 공항 활주로를 내리며 본 LA를 아직도 아내는 그때 처음 본 소감을 몇 단어로 정리한다. 갈라진 차도, 나지막한 판잣집들(집들이 대부분 단층 나무집이라), 그리고 황량한 사막. 이곳에서 5년 남짓 미국 생활과 문화에 길들여지며, 가족도 늘리고(어머니의 합류와 둘째 아이), 한국을 떠날 때의 '3년만'이었던 계획이 5년이 되면서 '영주'로 바뀌어 가는 이곳의 이민자의 궤적을 밟아가게 되었다.

top-topanga-overlook-woodland-hills.jpg Valley라 불리는 이곳의 여름은 불탄다

작은 벤처로 시작한 Semiconductor Tech Company였던 직장(Chatworth, CA)을 따라 자리 잡은 마을은 LA 북쪽 끝의 Woodland Hills라는 동네로, 아르메니안들과 유태인, 그리고 당연히 히스패닉이 자리를 튼 곳.


그 당시 한인은 이 근처에서 찾아보기 힘들어, LA 한인 타운까지 차로 40분 걸려(당시 40분은 왜 그리 멀었던지) 가서 한식과 말로 향수를 달래곤 했었다. 하긴 아파트의 BBQ area에서 김을 굽고 있던 내게 살짝 다가와서 왜 종이를 태우고 있냐고 묻던 주민이 있을 때이니 30년 얼 추 지나 Costco에서 간식용으로도 구운 김을 파는 것을 보니 아는 만큼 시간도 가는 것 같다.

IMG_7828.jpg 지금은 Costco에서 김을 쌓아놓고 팔정도다

당시 아파트에 살던 한인 가족이 약 4~5 가구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대부분이 다른 business를 운영(배달식당, 골프용품, 의류도매, 간호보조 등등) 하였고 engineer라는 명목으로 월급쟁이로 일했던 것은 우리 가족이 처음이었던가보다. 이제 막 20대를 벗어나려 했던 우리 부부의 상당수 시간은 Malibu 해변이 차지했었고, minvan(Caravan)에 놀이 삽과 bucket을 싣고 'Sun goes down to the Santa Monica BLVD'를 부르며 얼굴을 그을러 갔다.

15398684905_f419ee28dc_b.jpg LA 북단의 Malibu Lagoon beach는 들어가는 길이 쉽게 보이지 않아 가족단위의 일행에 최적이다

Hoolywood가 있는 지역에 걸맞게 주민의 대부분이 마치 영화업에 종사하듯, 이곳 사람들의 몸매가 남달리 뚜렷하고 입성들의 노출도(?)가 파격이었던 것도 흔했고,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러 종류의 작가들이라는 것도 우연은 아닌듯했다.


아내는 미국의 힘을 느꼈던 첫 event로 Disneyland의 호수 위에서 펼치는 야간 laser show(Phantasm으로 기억하는)를 꼽고, 내게는 5년이 지나 회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 끝에 통과된 우리 부부의 '영주권'을 긴기간 포기하지 않고 걱정으로 support 해주었던 HR director의 눈물짓던 얼굴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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