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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아니야 '꼬꼬'야

Farm School에서 배운 딸

by I am YS


이곳에서의 삶은 '빚을 짓고 사는가 아닌가, 얼마나 짓고 사는가'로 단축된다. 들어오는 2주 급여(이곳의 봉급은 주급 단위라, 2주씩 수표로 지불된다)를 나누어서 아파트 세와 그 외의 공과금으로 떨구고 나면 손에 남는 것이 거의 없다. 아이가 어릴 때는 먹고 입는데, 크면 배우는 데로 들어 거의 같은 비례로 나가고, 차를 부부가 각각 몰아야(한대로 버티는 집도 물론 있지만) 기동성과 외벌이(H-1 visa는 배우자의 취업은 불법이다)의 경우 일에 전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에 월납부금(monthly payment)을 붓고 나면 그야말로 마이너스이다.


Check-book을 이용하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가계정리와 money management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실감한다. 특히 격월로 나오는 '보너스'의 개념이 없기에, 한 달에 근사한 식당에서 외식 한번 한다는 것이 중산층(그때 우리 income으로는 중산층)에서는 자랑이 될 정도다. Credit card를 얻기가 까다로운 시절이었기에, 한국에서 쓰던 AMEX가 그리 도움이 될지는 미처 가늠하지 못했었고(card account가 그대로 미국으로 transfer 됐기에).

s-l1200.jpg 한국에서 본의 아니게 만들었던 AMEX가 신용사회인 미국 정착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내가 몇 달을 발품팔아(그때는 internet이 없었기에, Atlas Map만 가지고) 찾아낸 딸아이의 pre-school(2~4세 아이들이 가는 유아원)로 농장이 딸려 놀리기에 집중하는 'Farm School'이라는 곳의 학부모가 되기로 결정했다. 아이들에게 식사예절과 찻길 건너는 법, 친구들과 노는 법, 그리고 동물들과 친해지는 법 등등.

au2.jpg LA 같은 대도시에서 마음만 먹으면 이런 시골스러운 학교에 다닐 수 있다.

이제 막 영어와 한글을 섞기 시작한 딸애가 애꿎은 다른 아이에게 야단을 치고 있다. 아마 칠면조를 가리키면서 같은 반 아이가 '털키(turkey)'라고 부른 것을 '토끼'로 듣고서는 "아니야 '꼬꼬'야 '꼬꼬', '토끼' 아니야"라고 반복적으로 소리치고 있었다.(그러던 딸아이는 북가주의 명문 사립대에서 영어와 교육을 전공한 후 사학재단에서 교육 관련 일을 하고 있다)


부부가 갖 이민 와서 잘 안되는 영어로 아이 뒷바라지하는 게 안 돼 보였는지 딸아이 선생(미혼의 백인여성)이 특히 우리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하곤 했는데, 어느 날 자신의 약혼 party에 우리 가족을 초대했다. 조용히 존재감 없던 같은 반 여자아이 부모와 우리만. 결혼과 관련한 일련의 피로연들이 얼마나 private한일(주로 본인의 친구들과 양가부모들만 초대한다) 인지 그리고 얼마나 고마운 사건인지는 10년도 넘어서 알아챈 일이다.

학년이 몇 해로 넘어가면서 LA 회사가 문을 닫은 후, 북가주(Nothern Cal)의 Silicon Valley(Santa Clara)로 새 회사를 정해 이사하게 되었을 때 모든 선생님들이 다 같이 나와 인사를 하고 눈물짓던 일도 미쳐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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