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들이 많이 걸린다는 그 공황장애요?
내 상태를 들으시곤 의사선생님은 문진표 하나를 건넸다.
30개정도 항목이 있었는데 거기에 해당하는 것만 체크하면 된다고 했다.
체크를 하다보니 거의 다 나에게 해당되는 항목들이였다. 뭐지?
그때까지도 별 생각이 없이 체크한 문진표를 선생님께 드렸다.
"공황장애네요. 사람들은 본인들이 아프단걸 잘 몰라요.
감기나 걸려야 병원에 가지 마음이 답답하면 병원에 잘 안가거든."
뜻밖에 병명이였다.
내가? 공황장애라고요?
TV에서나 보던 그 공황장애?
욱하긴 해도 금방 까먹는 단순한 성격인 내가.
밝고 긍정적이던 내가.
꿈을 향해 열심히 살던 내가.
믿기질 않았다. 받아드려지지도 않았다.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 나오는데 눈물이 주륵났다.
나 이거 진짜 먹어야 될까? 먹으면 과연 나아지기는 할까? 언제까지 먹어야할까?
오만가지 생각을 안고 약국에 가서 약을 받고 매장에 갔다.
요새 힘들어 하던 나를 걱정했던 매장사람들이 내가 도착하자마자 대체 어디가 안좋은거냐며 물었다.
"제가요.. 공황장애래요.."
다들 놀라며 공황장애? 그 TV에서 보던 그 공황장애? 라며 이야기했다.
너무 혼란스러워 그날 일은 어떻게 마무리 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이틀 정도 처방받은 신경안정제를 복용했다.
그 순간에는 기분이 좀 나아졌다. 숨 쉬는 것도 한결 편한듯 했다.
그치만 약먹는 순간 뿐이였다. 약을 먹지 않는 시간에 밀려오는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처방받은 약을 다 먹어갈때 또 병원에 가고싶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와 답답한 마음에 글을 썼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내가 왜 공황장애인건지 이 약을 먹으면 나아질건지 등등.
정말 신기하게 솔직히 글을 쓰고 나니 한결 후련했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온 자신감인건지 내가 이 병을 이겨낼 수 있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마음의 병이기에 약물치료 보다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해도 나는 다음날 눈 뜨는 것 조차 두려워했었다.
출근하기 전 날에 잠이 들때면 내일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했다. 아니면 쓰러져서 한달정도는 입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 마음이 듦에도 불구하고 그만두지 못한 이유를 추려보자면 한가지는 내가 그만두고 싶어할 때 언니가 급하게 결혼을 했다. 이것은 언니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언니에게 힘들때나 즐거울때나 항상 의지했던 내가 하나뿐인 언니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거라곤 결혼선물이였고 상견례할 때 내 직업을 당당히 말하고 싶었던 것도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부모님 때문이였다.
한번은 엄마아빠 아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내 직업을 물으셨을 때 나를 대신해 엄마가 했던 말이 있다.
"우리 딸 파리바게뜨 본사다녀. 본사!" (우리 회사는 당시 SPC본사가 아닌 협력업체였다. 물론 정직원이였지만. 그리고 지금은 명칭이 조금 바뀌었지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엄마는 저렇게 대답했었다.
춤을 출 때 나를 자랑스러워 한 것을 본 적이 없었고 어딜가서 내 직업을 말할 때 얼버무리듯 말했던 엄마인데 저렇게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더욱이 그만둘 자신이 없었다.
막말로 내가 지금 당장 그만둔다고 한들 어디서 부터 무얼 다시 시작해야되며 춤을 시작하기에 너무 멀리왔다는 나의 합리화로 인해 꿈도 잃어버린 상태였기에.
몇가지 이유들로 인해 결론적으로 마음의 확신도 없었고 주변환경으로 인해 전전긍긍 붙잡았던거 같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병마와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모태 기독교이지만 회사생활을 시작한 후에 교회를 출석하지 않았었다. 스케쥴 근무라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일이 빈번해서. 그렇지만 내가 그 당시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교회는 출석하지 않았지만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고싶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내려놨다.
어차피 해야할 일이라면 그 안에서 작은기쁨부터 찾자는 생각이 1번이였다. 힘듦이 100개여도 기쁨 1개를 찾는 것을 목표로 두었다. 보는 관점을 바꾸려 하고 그렇게 하루를 시작할 때 마음을 비운 채 시작하려 노력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였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조금씩 나아졌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 중 또 하나가 처음 이 매장을 받았을 때 교육기사님께 들었던 말 덕이다.
여기는 바쁘고 힘들지만, 사람들이 좋다.
내 인생에 정말로 어쩌면 제일 힘든 시기였지만 그 힘든시기에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 사람들 덕분에 1년 반이라는 시간을 버틸 수 있었고 위로받을 수 있었고 변화할 수 있었다.
지금도 연락하고 만난다. 내 사회생활에서의 제일 큰 수확이라 볼 수 있다. 지금은 정말 감사한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질 때 쯤 매장을 옮길 기회가 생겼다.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은 너무나 아쉽지만 나의 건강과 정신을 위해 옮기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고 그들도 그러는게 좋겠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헤어지는 것은 적응이 되질 않는다. 이 날도 질질 울었던 기억이 있다)
옮긴 매장은 회기에 있는 매장이였다.
그 시간안에 나름 안정을 찾고 일의 노하우도 생겼으며 경력도 쌓아갔다.
그러나 내가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으며 좋아하는 일도 아니였기에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늘 마음에 품고 지내다 문득 다시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며 취미로 잊었던 춤 레슨을 듣기도 했다.
예전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과 많은 사람들이 날 잊었다는 것이 여러가지 상처로 다가왔다.
일을 하고 춤을 춘다는 것이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다. 대학교 때는 하루종일 춤을 춰도 힘든 적이 없었는데 나이도 나이지만 일을 하면서 몸이 많이 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즐겁게 춤추지 못할 바에 하지 말자고 생각해서 몇개월 듣다 포기했다. 알 수 없는 감정들로 힘들었다. 나는 분명 댄서였는데, 그 속에 같이 있었는데 이제는 밖에서 그들을 보고있고 섞일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더 이상 춤을 출 수가 없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젠 나는 뭘 해야할까.
집에 와서 책장을 찬찬히 보는데 몇년 전에 모았던 CD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동안 힙합에 빠져서 그것도 재즈힙합에 빠져 쟁여둔 뮤지션들이 가득했다.
그 안에 프라이머리 CD는 거의 전집을 다 가지고 있었다. 아, 나 프라이머리 덕후였지.
당연하게 매일 듣던 음악들이 자이언티, 프라이머리, 쿠마파크, 소리헤다, 재지팩트 이런 뮤지션들이였다.
프라이머리 CD를 구하려 홍대까지 찾아가고 중고장터에서 발매가 끝난 초창기 앨범들도 사 모으기도 했다.
자이언티는 데뷔 초창기부터 좋아해서 싸이클럽(팬클럽 같은)에 글을 쓰기도 하고 처음 들었던 Click Me 는 가히 충격적이였다. (지금도 너무 좋아한다)
그렇게 음악에 빠져 들었었다. 그러면서 나도 저들처럼 살면 너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투브에서 본 머신패드를 연주하는 영상을 한참동안이나 보고 있으면 행복했다.
음악을 만들고 악기를 연주하는 창작활동을 하며 사는 인생은 어떨까.
나도 저런 음악을 만들어 보고싶다라는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춤과 연결되는 연결고리의 예술이 아닌가.
춤보다는 음악적으로 빛을 볼 수 있는 길이 많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다. 잊었던 마음 속에 예술가라는 꿈이 꿈틀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