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자체가 빛

우리는 서로에게 미약하게나마 빛을 쏴주고 있다.

by 기역
사회인으로서 누나의 스펙은 그녀가 지원한 회사가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누나는 그저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by 렌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책을 읽고 나서 기억에 남는 문장은 얼마나 되는 걸까.

1년에 적게는 10권에서 많게는 50여 권 정도의 책을 읽어도 마음에 남는 문장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 책은 그런 내용이었지 하고 어렴풋이 생각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읽은 일본 에세이의 한 문장은 내게 강한 여운을 남겼다.

유려한 문장은 아니었지만 계속 생각이 나는 문장이었다.


작가는 일본에서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쉽게 이해받지 못할 수 있는 특이한 일이지만, 일본에 사는 그는 그 일을 업으로 살아간다.

사실 그에게는 취업준비 스트레스로 자살한 누나와 사회생활을 일찌감치 포기한 형이 있고 본인도 회사생활에 어려움을 겪은 과거가 있다.

그래서 그는 존재 자체가 급여가 되는 존재급여라는 것에 강하게 끌리게 되었고 본인을 대여해 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렌탈 서비스'를 시작하게 된 거였다.


그런 그가 누나에 대해 한 말이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누나가 사회인으로서는 결격 사유가 있을지 몰라도, 존재만으로도 자신에게는 의미 있었다는 말이 내 마음에 오랫동안 남았다.

아무도 내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나는 스스로의 변변찮음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왜 나는 남들처럼 오랫동안 진득하게 회사를 다니기가 이토록 버거운지, 사람은 왜 내겐 결국 이렇게 힘든 존재인지 해답 없는 터널을 걸어갈 무렵이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그 말이 위로가 됐다.

내가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의미가 있다는 말로 다가왔다.


@grim_giyeok

연락을 하고 지내지는 않지만 아버지도, 남동생도 내게 존재만으로 의미를 가지는 사람들이다.

서로 굉장히 아낀다거나 대단히 의지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들 각자가 그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의미가 있다.

그들의 건강과 안녕은 내가 일상을 일상적으로 보낼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안녕에 감사 인사를 전하지는 않지만 감사한다.


'존재 자체가 빛'이라는 추앙의 말이 인터넷상에서 많이 회자된 적이 있었다.

그 말이 맞다면 우리는 존재만으로도 서로에게 빛을 쏴주고 있는 것이다.

태양처럼 밝게 빛나야만 빛인 것이 아니라 희미한 빛도 빛이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어서 그 사실을 자주 잊는다.

그렇지만 가끔은 그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삶은 누구에게나 유한하다.

사람이 살고 죽는다는 것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사고나 질병이 사람을 가려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 슬퍼진다.

하지만 통제변수가 아닌 것들을 생각하며 슬퍼하기보다는 오늘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살아가야겠다.


*아모르파티(Amor Fati)로 가는 열세 번째 마음가짐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나의 존재 자체가 빛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며 일상을 일상적이게 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자.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D


글쓴이/그린이 : 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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