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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나다로 떠난 벨라 Apr 13. 2022

외국에서 사는 게 이렇게 힘들었나?

태어나 처음 느끼는 외국 생활의 낯섦과 깨달음



현재 나는 지금 캐나다에 살고 있다. 캐나다 중에서도 한국 드라마 '도깨비'로 유명해져 한국인이 꼭 가보고 싶은 관광지중 하나로 꼽히는 퀘벡(Québec)에 살고 있다. 마케터라는 본업 외에도 나쁘지 않은 영어 스피킹 실력 덕분에 퇴사를 하고 통역사가 되어 14시간을 비행기를 타고 물 건너 퀘벡에 왔다. 이곳에 도착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며 새로운 시작을 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6개월 전,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며 번아웃을 느끼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회사로 출근하는 아침이 너무 지옥과 같았다. 꽃다운 나의 20대 시절 스트레스로 원형탈모가 왔으면 말 다 한 거 같다. 밤낮이 바뀌어 가며 일하다가 처음으로 정신건강이 육체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처음으로 느꼈다. 매일같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 필요가 있을까?", "나는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 걸까?" 이 2가지 질문을 퇴근하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졌다. 결론은 '퇴사'가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고 끝내 회사에 퇴사 통보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TOP3에 넣어도 될 거 같다.)


행운인지 우연인지, 퇴사 소식을 들은 지인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캐나다 퀘벡으로 통역사로 일하러 가는 것을 제안했고 나는 1초의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승낙했을 당시에는 지금까지 열심히 일한 것을 보상받는 기분으로 승낙했다기보다는 한국과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나만의 시간을 갖으며 삶을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서였다. 그래도 나름 비교적 젊은 나이에 마케팅 팀장이 되어 남부럽지 않은 월급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건강이 악화되고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이 삶이 진정한 성공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 매일 나 자신과 대화를 했고 이와 같은 인생에 회의감이 들었던 게 분명하다.


결정으로부터 한 달 뒤, 옛날이면 목숨을 걸었던 돈, 명예, 욕심은 모두 다 버리고 퀘벡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렇게 14시간 후,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하늘을 봤는데 나를 반겨주듯이 캐나다의 3월은 하늘에서 아직도 눈이 펑펑 오고 모든 세상이 흰 눈으로 덮여있었다. 캐나다의 3월도 아직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듯이 나도 설렘을 가득 안고 멍하니 공항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웃었다. 그렇게 나의 캐나다의 여정이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설렘은 잠시, 내가 예상했던 퀘벡과 현지에 도착했을 때 직접 마주한 퀘벡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에 생각보다 커서 당황했다. 지금까지 나름 해외에서 거주하고 일했던 많은 경험과 수년간의 잦은 해외여행을 했기에 이번 해외근무와 생활에도 잘 적응할 것이라고 자부했지만 오만은 문제를 낳았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해외 경험은 빙산의 일각임을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깨달았다.


첫째로는 생각보다 더 위험하고 생소한 일터 환경.


통역을 해야 하는 곳은 웬 석탄 같은 흑연가루가 떠다니며 안전모를 쓰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다소 위험한 현장이었다. 공장 주변에 그나마 작은 마을(구글 지도에서는 이를 도시(city)라고 표현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마을수준)에 내가 지내게 될 숙소가 있었다. 그렇게 외국인 노동자가 되어 흑연가루를 마시고 열심히 피를 튀기며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통역을 해야 했다. 심지어 통역사인 내가 계속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공장 안에서 불규칙하게 업무를 줄 때만 잠깐 필요하거나 가끔씩 높으신 분들이 왔을 때 대면/비대면 미팅에서 몇 시간 동안 통역을 해야 하기도 했다. 더불어 여러 통역을 해봤지만 이번 통역은 1타 3피처럼 통역을 도와줘야 하는 인원이 최소 3명에서 최대 4명인 것이다. 그래도 이와 같은 환경에서 한 달이 지난 지금 개인적인 영어실력과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되고 있으며 현재 통역을 맡은 3개의 한국 회사와 캐나다 공장은 생각보다 시장규모가 엄청 큰 전도유망한 기업들임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2차 전지 같은 하나의 혁명적인 기술에 대해 한국을 대표해서 통역을 하고 여러 공학적인 영어 단어를 알게 되어 나름 진화를 했다고 본다.


둘째는 숙소 주변 인프라.


아무리 작은 마을과 같은 도시라고 해도 있을 건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숙소에 도착하고 다음날 동네 탐험을 떠나봤다. 무작정 핸드폰 속 구글 지도를 켜고, '식당', '식료품점', '빵집', '여성 복점' 등 보이는 대로 들어가 봤다. 가장 충격받았던 것은 지금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식당이 딱 3개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식당을 들어가든 어제 봤던 이웃주민을 웬만하면 다 볼 수 있었다. 빵집도 온 동네에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도 빵집은 내부에 들어가면 바게트와 케이크 그리고 에그타르트 등 오목조목 예쁜 빵과 제과들이 가득 찰 것을 기대하고 빵집의 문을 열었다. 웬걸. 진열대에 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판매하는 제품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카운터 주변에는 약간 오래되어 보이는 에그타르트 2개가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바로 나가고려 했지만, 주인분께서 안쓰럽게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조금 더 둘러보기로 결심하고 최대한 이것저것 불어 공부한답시고 시간을 끌고 "Je suis désolée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빵집을 나왔다. (나중에서야 알고 보니 지금 살고 있는 시골 도시는 여름 성수기 시즌에 레저스포츠를 많이 하러 오는 곳으로 그때 많은 상인들이 돈을 벌고 그 외 비수기에는 덜 적극적으로 가게를 운영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식사, 즉 먹고사는 문제.


해외여행 혹은 해외에서 어느 나라에 거주하며 한식 내지는 한국 라면을 안 파는 곳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 한 번도 못 본 곳이 존재함을 이곳에 와서 깨달았다. 그래도 나름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고 외국에 많이 나가본 사람으로 스스로를 자부했기에 마을에 있는 아무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음식을 시키고 편의점 같은 곳에 가서 즉석식품을 다양하게 시켜서 먹었다. 웃긴 건 100이면 99가 실패했다. 웬만한 모든 음식은 입에 맛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음식이 맛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여기 음식은 모두 다 내 입맛에 안 맞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와, 나 진짜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지?".


미리 스포일러를 하자면, 한 달이 지나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아주 잘 적응해서 잘 살고 있다. (그 방법과 노하우 그리고 고군분투하며 깨달은 삶에 대해 앞으로의 글에 재미있게 써 내려가 보고자 한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나와 같이 외국 깡시골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면, 살아남기 위한 꿀팁이 있다. 가끔 한식이 너무 그리울 때는 몇 시간이라도 운전해서 나가서 한인마트에서 몇 십만 원어치 장을 보고 돌아오는 것을 추천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내가 생각보다 한식을 되게 좋아했고 외국 음식에 대해 입맛이 까다로운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처음으로 한인마트에 가서 대거 쇼핑을 했을 때, 점원분께서 "캐나다로 이사 오셨나요?"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제 어디 가서 외국음식 좋아한다고 말은 절대 못 할 거 같다. 내가 한식을 좋아한 것을 깨닫고 인정한 다음부터는 한인마트 단골이 되어 포인트도 쌓으며 포인트를 사용하러 가는 맛이 쏠쏠한 재미를 느끼고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모르고 퀘벡에 온다고 했다니. 과거의 나를 돌이켜 후회해봐도 이미 늦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탐험을 멈추지 않기로 내 자신과 약속하는 밤이다.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내가 사는 집 -> 옆집 -> 앞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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