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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쌤 Oct 07. 2024

사춘기 아이는 변하지 않았다.

아이와 벌어진 그 틈 사이로 새로운 꽃이 피어나기를..

‘사춘기, 그게 도대체 뭐길래, 나도 겪고 내 동생도 겪고 내 친구도 겪고 모두가 겪고 지나왔을 그 사춘기가 도대체 뭐길래 내 분신 같던 아이가 갑자기 이렇게 나를 매몰차게 밀어내는 것일까


 나름대로는 준비한다고 준비하면서 맞은 큰 아이의 사춘기였습니다. 책도 많이 읽었고, 강의도 찾아다녔습니다. 누구에게나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이해하자고 호기롭게 생각했건만 막상 닥친 첫째 아이의 사춘기는 제 삶 전체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쌍둥이 동생에게 늘 친절했던 아이의 날카로운 눈빛에 이제 쌍둥이 동생 둘은 누나, 언니의 눈을 피해 다녔습니다. 엄마에게 와서 귓속말로 얘기하곤 했습니다.     

 

 “ 엄마,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누나가 화내.”

 “ 엄마, 언니가 문 닫고 나가래.”      


 방문과 함께 마음도 다 닫아 버린 건 아닐까 싶게 아이의 방문은 늘 닫혀 있었습니다. 핸드폰이 원흉이라며 핸드폰을 차단하는 앱도 깔고, 시간도 설정해 보고 여러 가지로 아이의 행동을 제지해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반쯤은 알고도 그냥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다 알고는 도저히 나의 불안감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 같았으니까요.      


 잠은 또 어찌나 많이 자는지, 하루에 18시간 정도를 잔다는 나무늘보가 된 건지, 틈만 나면 자고, 틈만 나면 핸드폰과 한 몸이 되어 있으니 공부는 두 말할 것도 없었지요. 지금껏 그토록 애쓰며 지켜온 독서 습관마저 모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사교육 안 시키고 엄마표로 교육하다가 이쯤이 되면 아이에게 바통을 넘기리라고 그렇게 불안감을 견디며 지켜왔거늘, 아이는 바통을 받을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지금껏 내가 쏟아부은 노력과 열정이 다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아 마음이 매일같이 폭우 속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시간을 모두 부정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아이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지만, 아이와 나를 분리하지 못했기에 아이의 그 모습이 나의 실패인 것만 같아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코로나 사태도 터져 내 수업도 중단되고, 아이도 학교에 가질 않고 종일 붙어 앉아 아이만 바라보고 있으면 더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틈만 나면 걷기도 하고, 책 속으로 도망을 가기도 했습니다. 아이와 나를 분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아이와의 관계 회복은 끝일 거 같은 두려움에 휩싸여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방법을 찾아야겠더군요. 이대로 나는 옳고, 너는 틀렸으니 제발 돌아오라고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고 나만 돌아버리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예전에 듣고 기록으로 남겨놓았던 조선미 박사님의 사춘기 특강 이야기를 발견했습니다. 조선미 박사님의 말을 빌리자면, 사춘기 아이의 뇌는 싹 무너졌다가 다시 조립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고 합니다. 십여 년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뇌가 다시 재조립되기 위해 한번 싹 무너졌다가 다시 조립되어 가는 과정이라니, 얼마나 불안하고 두렵고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까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화가 나는 마음을 좀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 조선미 박사님이 조용조용한 말투로 위로하듯 그러시더군요. 10살까지 애써 잘 키워 놓으셨으면, 지금 좀 망가지는 거 같은 모습을 보여도 조금 참고 보아주셔도 괜찮다고요. 죽고 사는 일 아니면 좀 내버려 두셔도 괜찮다고요. 교복을 입고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잠이 들어도, 매일같이 라면만 먹겠다고 말을 안 들어 먹어도 괜찮으니 좀 내려놓으라고요. 뇌가 다시 조립되고 나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을 믿으라 하셨습니다.          


 엄마인 나는 내 아이가 쨍하게 빛나고 밝은 빨간색으로 자라기를 바랐습니다. 아이도 나의 온 세상인 엄마가 그걸 바라고 좋아하니 더 쨍한 빨간색으로 자라 보려고 애쓰면서 자라왔겠지요. 그런데 마음속에 나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고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되는 사춘기라는 시기가 닥쳐 나를 돌아보니 내가 가진 색깔은 빨강이 아니라 파랑일 수도 있지요. 그러면 아이도 당황하고 엄마도 당황하겠지요. 엄마는 무언가 크게 잘 못 되었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아닌데, 이 아이는 분명 빨간색이었는데 왜 이렇게 파래지는 거지? 왜 이렇게 잘못되어 가는 거지?’ 하고 말입니다. 아이도 끊임없이 엄마에게 그런 메시지를 받으며 내가 무언가 잘못되었나를 고민하며 닦달하는 엄마에게 입을 닫고 멀어져 갑니다. 내가 빨간색의 아이의 원했는데 아이가 주황쯤, 노랑쯤이었다면 그러면 조금 덜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내 아이가 가진 색이 무슨 색일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아이가 가진 색이 설령 내가 생각하고 꿈꿔온 색깔과는 정반대의 색일지라도 그것을 빨리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아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빨강이 아니라 파랑이라고 외치는 아이는 어쩌면 자신의 색을 속이고 빨강처럼 살아가는 파랑보다 더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빨간색쯤의 아이를 원했다면, 첫째 아이는 그나마 빨간 색이 섞인 보라쯤은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슬슬 사춘기의 조짐이 보이고 있는 저의 쌍둥이 남매는 또 어떤 예상치 못한 색깔을 가지고 있을까 단단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애쓰며 키운 우리 스스로를 칭찬하며 우리는 변한 아이가 아니라, 진정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는 아이를 응원하며, 이제 ‘나’를 찾는 일에 조금 더 애를 써보면 좋겠습니다. 아이와 나 사이 벌어진 그 틈으로 새로운 꽃이 피어나도록 기꺼이 틈을 허락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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