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탯줄 끊어내기
엄마의 이혼을 응원하는 쿨 한 아이가 되기까지..
2012. 6.29.
쌍둥이 낳고, 그 해의 여름은 반쯤 정신이 나간채로 허둥대며, 외동딸 엄마에서 세 아이의 엄마로 거듭나고 있었습니다. 어른 하나가 다섯 살 아이 하나와 신생아 둘을 보는 게 가능은 한 일일까. 내 모성애가 평균 이상쯤은 되는 것 같은데, 이건 정말 극한 체험이지 싶게 처절했습니다. 어떻게든 내 힘으로 세 아이에게 다 온전한 사랑을 주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그 서른한 살까지 그 어느 것에도 이렇게까지 욕심 내 본 일이 없는데, '엄마'라는 이 자리에는 왜 그렇게도 집착에 가까운 욕심을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 돌이 지나고 건치를 자랑하던 이가 너무 아파서 치과에 갔더니, 운동선수냐고 묻더군요. 버거움을 이겨내느라 그리도 이를 악물고 살았나 봅니다. 이미 잇몸이 50대 후반의 상태라고 하시며, 이 악무는 습관을 고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매일 완벽한 엄마의 모습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다섯 살짜리 큰 아이는 엄마가 변했다며, 예전의 엄마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울기도 했습니다. 그때도 저는 살기 위해 책을 읽었습니다. 육아서를 읽고 정신이 들면 한 2-3일쯤 또 좋은 엄마였다가, 체력이 바닥나면 소리소리를 지르는 엄마였다가를 반복하며 살았습니다. 세 돌까지는 절대 어린이집도 안 보내겠다며, 나 혼자 어떻게든 세 아이를 케어해 보겠다며 악착을 떨며, 완벽한 가정을 꿈꾸었습니다. 나만 좀 더 참으면, 나만 좀 더 희생하면 그런 완벽한 가정이 가능할 것 같았나 봅니다.
퇴사를 하고 육아에 전념하기 시작했던 큰 아이의 두 돌쯤부터 독서 교육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루도 책을 안 읽어준 날은 없을 만큼, 도서관을 마트만큼 드나들며, 먹이는 일만큼 읽어주는 일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쌍둥이 탄생으로 잠시 미뤄두었던 독서 교육 공부는 큰 아이 초등학교 입학, 쌍둥이 어린이집 입학과 함께 본격 직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일의 시작도 모두 내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과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육아는 제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아이들은 나였고, 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이런 제가 아이들과의 두 번째 탯줄을 끊어냈습니다. 평생 아이들 곁에서 전전긍긍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위해 내 몸 하나 바칠 듯이 살았던 제가 지금은 제 인생을 삽니다.
누구보다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던 저였습니다. 그러기 위해 육아서를 수십 권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만난 큰 아이의 사춘기. 육아서를 읽어봐야 내가 하지 못 할 일 투성이고, 내 말은 콧구멍으로 듣는 저 아이에게 하나도 가 닿지 않는 말들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육아서를 내려놓고 고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아이를 위해서 할 일은 '나'를 찾아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이겠구나. 그것이 나와 아이 모두를 위한 일이겠구나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들여다보기 시작한 '나'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마흔이 다 되도록 저는 제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습니다. 나는 내가 궁금하지 않았고, 내 생각보다 그냥 세상에 맞춰 사는 일이 더 편했고, 나의 시선보다 남의 시선이 더 중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꿈꾸던 완벽한 가정이라는 것. 그 기준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완벽한 가정이라는 것도 실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오만이 깨지는 순간들이었습니다. 내가 아이들에게 주고 싶던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던 나의 생각과 지침들은 모두 맞는 것이었을까.
내 안에 가둬 키우면 내 아이는 잘 자라서 내 틀 안이겠구나. 아이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길 원하면서 나는 아이를 내 틀 안에 가두고 싶어 했다는 모순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니 아이가 조금씩 놓아졌습니다. 아이는 내 생각보다 더 나은 생각을 할 수도 있는 독립된 인격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실수하고 실패하겠지만, 내가 내 삶을 돌아보니 실패가 두려워 도전하지 못한 삶에 대한 미련 투성이더군요. 내 아이는 나처럼 키우지 말아야지. 실수하고 실패하면 아프겠지만 그것도 두 번째 세 번째는 처음보다 낫고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도 배워 더 잘 아물어 갈 수 있는 게 진리이니까.
그 쯤 언젠가 제가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니 그 이전부터 종종 꿈꾸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아직은 이혼하지 못하고 살고는 있습니다. 그 사실을 처음으로 친정엄마에게 털어놓았던 날이 저에게는 큰 깨달음의 순간이었습니다. 그간의 어려움들을 진지하게 엄마에게 털어놓고, 이혼이 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이와 한 몸이라 여겼던 저였기에, 저의 엄마도 저의 그런 이야기에 혹시 몸져누우시면 어쩌나 한 걱정을 담아 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담담하시더군요. 마음이 아프셨겠지만 엄마는 제 생각처럼 무너지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단번에 그래라. 하신 건 아니셨지만 엄마는 저의 고통과는 한 걸음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음은 아프지만 그건 저의 일이고, 결정도 저의 몫이라 여기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저한테는 오히려 너무 큰 위안이고 힘이 되었습니다. 엄마와 나는 한 뿌리로 엮여있는 한 몸이 아니라, 그저 저만치 떨어져 언제든 나를 바라보며 내가 쓰러지면 잡아줄 힘이 있는 존재구나 하는 걸 느껴 안심이 되었습니다. 내가 쓰러지면 같이 쓰러져버릴 엄마가 아니라, 나를 다시 일어나도록 도와줄 힘이 있는 엄마. 내 자식들에게 내가 되어주어야 하는 건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게 아이와 나 사이, 분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사춘기 아이를 놓았습니다. 세상 모든 일에 정답은 없지만, 저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고, 이 시기를 잘 보내고 사춘기가 끝나면 다시 엄마에게 친구 같은 딸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말을 믿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부터 제 삶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살고 싶은 모습은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삽니다. 처음으로 내 사업을 하며 매일 새로운 것을 배워갑니다.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어 공부 고민을 털어놓으면, 저는 제 사업 고민을 털어놓고 함께 이야기를 나눕니다. 과정을 즐기는 삶을 삽니다. 어떤 결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이렇게 매일을 기쁘게 새롭게 살아가는 제 모습을 보여주는 걸로 이제는 육아를 대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리적인 탯줄을 끊어내는 일, 아이는 나와 다른 독립된 인격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 그것이 아이의 사춘기를 만나고 해야 할 가장 큰 숙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의 범위를 정하는 종류의 일보다 우선 내 마음을 고쳐먹는 일. 그게 더 우선일 것입니다.
사춘기를 그렇게 지나온 저의 큰 아이는 엄마와의 산책을 즐기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어 있습니다. 아이는 가끔 저의 이혼을 응원하기도 합니다. 아이도 저와 마찬가지로 그건 엄마의 삶이고 엄마의 선택이지 아이 본인의 삶은 아니니까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