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_알을 깨야 하는 건 바로 지금!
선과 악이 모두 존재하는 것이 '나'이자 세상이라는 사실..
제목: 데미안
작가: 헤르만헤세
데미안은 한 번쯤 읽어 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청소년기에도 한 번쯤 읽었던 것 같고, 20,30대에도 읽었습니다. 사십 대가 되어서 저는 이 책을 3-4번 반복해 읽었습니다. 그제야 이 책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하니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저는 저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어서 내가 궁금해졌는지, 나에 대해 알고 싶어서 더 책에 빠진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데미안을 비롯한 고전 읽기는 제 삶을 바꿔놓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더군요.
독서의 최종 목적은 ’나‘를 알기 위한 작업이라는 것, 책에서 얻어야 할 것은 지식뿐만이 아니라 ’나‘에 대한 성찰이라는 것을 몸소 깨닫기 시작한 책이 바로 이 데미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백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시대에 사십 대는 아직 인생의 반도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이지만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방향을 결정짓게 되는 아주 중요한 순간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압락사스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상, 그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이 나이에서야 깨달았습니다. 그 사실이 저에게 중요했던 이유는 내 안에 억누르고만 살았던 나의 어두운 세계를 마주할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어두움은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며 살았기에 나 전체를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책이 재미가 없는 이유는 나와 연관 짓지 못하는 이유도 큽니다. 나와 아무런 접점을 찾지 못하는 이야기에 우리는 모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관점으로 책을 바라보면 어느 책도 나와 상관이 없는 책은 없습니다.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저는 한 번도 내 알을 깨고 나올 마음을 먹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삶, 있는 상황에 그대로 적응하고 순응하고 사는 것만 안전하고 좋다고만 느끼며 살아왔기에, 제 세상은 늘 좁았습니다. 내가 사는 세상을 벗어나지 않을 거라며 살아온 좁디좁은 내 세상이었습니다. 당차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여자들을 동경하면서도 그건 그저 저들의 세상으로, 내가 살아야 하는 세상은 정해져 있다고만 믿었습니다.
싱클레어가 왜 그렇게 방황을 했는지, 알을 깨고 나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되게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알고 나서야 싱클레어를 이해했습니다. 내 안을 들여다보며 내 세상을 넓혀가는 일은 고되고 혼란스럽고 힘들었기에 자주 종종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자주 데미안을 펼쳤습니다. 내 안에 있는 내가 악이라고 믿었던 내 세상도 나임을 인정하기까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이 악이 있어 선이 존재하고, 어둠이 있어 밝음이 존재하듯이, 선과 악이 모두 뒤엉켜진 나를 바로 보는 일. 그것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악이라고 믿은 많은 것들이 정말 악일지, 그것부터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흔부터 거꾸로 나의 삶을 되짚어 보기로 했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며 꽤 독립적이고 씩씩하게 내 삶을 헤쳐나가고 있었다고 믿으며 살아온 지난 십 년 넘는 세월부터 돌아보았습니다. 그 세월 동안의 내가 많이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툭 치면 부서질 듯한 유리 가면을 무겁게 짊어지고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 같은 건 들여다보면 큰 일 날 것처럼, 잘 못 건드려 저 아래 가라앉아 있는 것들이 만져지면 온 물이 다 흙탕물이 되어버릴 것처럼 조심조심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 이유를 한참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 이유를 데미안에서 찾아낸 겁니다. 저는 어두운 내 세상이 있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미숙한 어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이 아이를 마음에서 독립시키는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는 ’ 어른‘이라고 생각했고, 충분히 아이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고, 내 말이 아이에게 모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미숙한 어른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부터 사실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고 할까요? 아니, 오만함이 내려놓아 졌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내 아이가 나보다 나은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아이의 인생을, 나는 앞으로 나의 인생을 설계해 가면 되겠구나, 내가 지금부터 용감하게 설계해 가는 나의 뒷모습을 보며, 아이는 아이가 가진 역량과 색깔대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 가겠구나, 나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 책을 사춘기시기에 누군가 제대로 이끌어주었더라면 내 삶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면 다행이겠지요?
아이들의 사춘기, 제대로 겪지 않으면 언젠가는 아프게 겪어야 할 일입니다. 나를 만나느라 혼란스럽고, 나를 정립해 가느라 애쓰고 있을 우리 아이들을 한 발 물러서서 응원해 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