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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수 Feb 26. 2023

진실의 무게

커밍아웃할 때 나오는 반응들을 유형별로 나누어 보다.

진실의 무게 


한때 내가 '김규진'씨가 되기를 꿈꿨을 때 (참고: https://brunch.co.kr/@nollercoaster13/27) 나는 약간 무차별적으로 커밍아웃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나는 내향형보다는 외향형으로 여러가지 모임에 속해있는데 내가 속한 모임에는 다 얘기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임마다 적당한 기회를 노려 커밍아웃을 감행하였는데 모임에 따라 반응하는 양상이 달라서 아주 흥미로웠다. 





첫 번째 유형은 속성 인정형 이다.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순수하게 흥미로워 하는 쪽이다. 주로 20대와 30대 초반이 이 그룹에 속한다. 이 그룹은 먼저 '아 ~ 그렇구나' 라고 반응하고 '근데 여자친구는 어떻게 만났어요?' 식으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흘러간다. 어떨 때는 '아, 그럴줄 알았어요' 라고 반응 하는 쪽도 있다. 한 후배는 내가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저 선배, 메갈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남자친구가 있지?'라고 혼자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후에 내가 커밍아웃하자 마치 '개비스콘 짤'의 사람처럼, '아~ 그렇구나!' 라고 혼자 가슴을 쓸어 내렸다고 한다. 내 옆 자리에 앉은 6개월 계약직 동료에게 밥먹고 산책하면서 툭 커밍아웃 한 적이 있다. 그 동료도 역시 놀라지 않고 '샘,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보여?'라고 (흠칫 놀란 가슴으로) 물어보았더니 그냥 그럴 것 같았다고 하면서 '제 주위에 레즈비언 좀 있어요. 다 평범하게 생겼어요.' 라고 나를 점잖게 훈계했다. 내가 카풀을 제공했던 남자 후배에게 직장 출근하는 길에 커밍아웃했더니 그는 차 안에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채로) 샘, 너무 축하해요~~!' (이 친구는 정말 감성적이다.) 나와 같이 공부하는 미국에서 박사를 하고 온 50대 중반 선생님에게 커밍아웃했을때는 깜짝 놀라면서 '애인이라고 해서 당연히 남잔 줄 알았는데, 정말 내 편견이 놀랍다.' 라고 웃으며 바로 '도대체 어떻게 만난거야?' 하면서 즐거워 했다. 놀랍게도 우리 엄마도 이 유형에 속했다. 한국 나이 39살에 엄마에게 조용한 장소로 불러 진지하게 커밍아웃 했는데, 엄마는 하나도 놀라지 않으며 축하해줬다. '혼자 늙는 것보다 얼마나 좋노.' 라고 웃으며 답했다. (오히려 나 혼자 펑펑 울었다.) 





두 번째 유형은 은근한 걱정(을 가장한 부정)형이다. 다행스럽게도 내 면전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직 한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걱정을 하면서 은근히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치는 사람들이 있다. 나와 가장 오래된 중학교 친구중 한명에게 인스타 디엠으로 커밍아웃 한 적이 있다. 이 친구가 내가 자꾸 올리는 커플사진에 궁금증을 느끼고 드디어 내게 메세지를 보냈는데 내가 커밍아웃 한 것이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갑자기 대화창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만나서 내가 설명했는데 이 친구는 '부모님에게는 말하지 마라. 얼마나 실망하시겠노.'라고 걱정했다. 나는 이 친구의 말이 편견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고쳐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와 서서히 멀어졌다. 또, 공부모임에서 좀 친한 선배에게 일대일 자리에서 커밍아웃 한 적이 있다. 그녀는 잘됐다고 축하하면서도 사족을 붙였다. '근데, 내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커밍아웃한다면 나는 정말 못 받아들일 것 같아. 너무 슬플것 같아.' 이 선배는 후에 나 없는 자리에서 나를 '아웃팅'하기도 한 사람이다.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또 거리를 두게 되었다. 





세번째 유형은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 유형은 주로 4~50대들이 속하는데, 내가 커밍아웃을 하면 짐짓 받아들이는 척,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척 하면서 넘어간다. 아니면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라서 잠깐 멈춘다. 그러다가 못 들은척 넘어가거나 급하게 화제를 바꾼다. 안타깝게도 주로 자신이 정치적으로 진보쪽에 있다고 생각하는 586세대가 대부분 이 카테고리에 속한다. 나는 50대 언니들과 하는 모임들이 꽤 있는데, 대부분 진보쪽이고 깨여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인데, 내가 커밍아웃을 하면 갑자기 로보트 처럼 뚝딱거리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 보통 그날은 내게 질문도 하지 않는다. 그냥 속으로 매우 놀랐지만 쿨한척 더이상 질문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날 모임은 그렇게 어색하게 끝이 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간이 가면 내게 하나씩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집안일은 누가 더 해?' '밥은 누가해?' 나는 정말로 이 분들이 용기를 내서 내게 더 질문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 





저번 글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서서히 이 무차별적 커밍아웃을 이제 줄여나가려고 한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이야기가 회자되는 2차, 3차 전달을 내가 막을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번은 내 학교동료를 집에 초대해서 커밍아웃을 한적이 있는데 그 중 한 명은 당연히 몰라야 하는데 온 몸에서 아는 것이 티가 났다. 학교 내 어떤 종달새가 이야기를 해준 것이다. 그 종달새가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가지만 누군지 파헤치면서 복잡하게 살고 싶지 않다. 올해 옮긴 새 학교에서는 왠만하면 커밍아웃을 최소화 하려고 한다. 걱정하는 또 다른 이유는 여기 다음에 내가 전근하길 희망하는 학교에서, 내가 옮기기도 전에 내 소문이 먼저 흘러가서, 재수없게 어떤 기독교 원리주의자 부장이 '얘는 안돼.'라고 하며 내 전근을 막는 파국적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김규진'씨처럼 대단하게 멋지고 퀴어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레즈비언이 되기에는 그릇이 너무 작다. 사람들 보고 진실의 무게를 감당 못한다고 했지만 사실 나도 모순인 점은 김규진씨처럼 쿨하게 진실을 말하고 다녔지만, 나 조차도 그 후에 생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전전긍긍 했다는 것이다. 나와 인연을 맺는 사람들 안에서 나로써 인정을 받고 싶은 당연한 욕구와 나를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나를 평가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속에서 적정한 선을 찾는 중에 생긴 생채기는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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