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희생은 부모의 미덕이다?

"엄마, 나 물감 놀이해도 돼?"

"응. 해도 돼."


 저는 배려심 깊고 이해심 넓은 엄마가 되고 싶었어요. '되고 싶었다'는 것은 현실은 그런 엄마와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겠죠. 앞서 이야기했지만 제 인내심은 간장 종지만큼이나 작았어요.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썩 내키지 않아도 좋은 엄마 코스프레를 하며 아이의 요구를 수용했던 적도 많아요. 좋은 엄마 돼주고 싶었고, 나도 아이 잘 키우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아이가 원하는 건 애지간하면 다 허용했어요. 나의 한계도 모르고.

그러다 결국 으아아악! 하고 분노하며 놀이가 끝이 났지요.


 참고 해주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어요. 육아서, TV 방송매체 등에서 한 목소리로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해주어야 자존감 높은 아이로 자란다고 말했거든요. 그래서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거라면 최대한 허용해주고 싶었어요. 감정이 수시로 천사와 악마 양극단을 달리는 엄마였지만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 마음 하나는 정말 간절했어요.


아이들이 놀고 난 뒤 물감으로 얼룩진 방바닥 닦다가 "C!",

아이들끼리 다투는 소리 나면 "AC!", 아이들 행동에 꼬투리를 잡으며 "EC!" 하게 되었어요.

내 꼬라지가 짜증 나서 "IC!" 하고 욕이 나오고 분노가 나왔어요.


 1초를 순간을 못 참고 분노를 폭발할 때면 잘 참고, 고생하며, 이를 악 물고 버텼던 것들이 전부 물거품이 된 것 같아 괴로웠어요. 울타리를 넓혀 가능한 많은 것을 허용해 주라고 말한 사람이 갑자기 원망스러웠어요. 머리는 배려와 사랑을 말하지만 가슴엔 분노가 치솟았어요. 머리와 가슴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큰 나머지 구제불능이라는 자기 모멸감, 내가 아이들을 망칠 거라는 죄책감, 그리고 수치심을 느꼈어요.


 한 가지 의문이 들었어요. 분명 처음엔 기꺼이 해주고 싶었고, 내 기분도 괜찮았고, 놀 당시엔 분명 좋았는데 왜 갑자기 화가 났을까요? 내가 변덕쟁이여서 그런 걸까요?



+ 어디서 많이 들었던 소리인데..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 했던 내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잘 자란 아이들을 내 자랑거리로 삼고 싶었던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은 진정한 사랑과 거리가 멀었어요. '엄마가 이만큼 해주었으니 잘 자라서 내 노력을 빛내줘.'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었던 거예요.


애써 키운 아이들이 커서 마치 자기들이 혼자서 큰 것마냥 굴면 내 마음이 어떨까 생각해보니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는 말이 툭 튀어나오더라고요.


 어?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맞다! 친정엄마가 자주 보던 드라마!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성에 안 차는 여자를 데려왔을 때에 엄마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내뱉는 단골 대사였어요.


 “너희들 때문에 참고 살았다! 너네 아빠랑 이혼하면 흠이 될까 봐!” 무능한 남편, 팍팍한 살림에 허리 한 번 못 펴보고 이 한 몸 다 받쳐 자식을 건사했는데 장성한 딸이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하자 퍼붓던 말도 생각났어요.


똑똑하고 반듯한 아이로 자라서 나의 공로를 빛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희생은 내가 준 것을 반드시 알아달라는 기대가 있거든요. 그렇기에 기대하는 보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분노를 하게 됩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요. 아이들이 놀고 난 자리를 닦으면서 그토록 분노가 났던 이유가 여기 있었어요. 이렇게 뻔질나게 놀기만 하고 대체 책은 언제 읽고, 공부는 언제 할까 내 노력이 모두 헛수고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럼 희생하지 않고 어떻게 키워야 하는 걸까요?


(다음 편 계속)

이전 10화 "그렇게 하는 게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을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