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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Aug 19. 2020

잃어버린 봄날

2020 코로나 19

봄의 전령이 찾아왔다.

인천공항 제1여객터미널 사무실 옆 화단의 매화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린 것이다. 그렇지만 금년 봄은 미세먼지는 차치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초유의 코로나 19 사태까지 발생해서 온 나라가 얼음에 갇힌 듯 굳어 있다. 입에서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온다. 문득 일기장의 작년 어느 화사했던 봄날의 일상을 들춰 본다.


2019년 오월 어느 날 영종도, 봄날도 이제 다 지나가려 한다. 봄이 다가오는 여름을 시샘이라도 하듯 몇 일째 짓궂은 바람을 일으키고 아침저녁으론 공기도 서늘하다. 봄 날씨는 변덕쟁이 처녀를 닮았다. 저녁을 들고 동네 공원으로 나섰다. 아침 출근 때 길가에 옹기종기 모여서 생기 넘치는 얼굴로 인사하던 들꽃이 절로 미소를 머금게 했었다.


산책을 나온 김에 산책로 주변에 어떤 들꽃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먼저 아파트 사이로 길게 뻗은 산책로 중간 둔턱의 소나무들 틈에서 이팝나무가 진녹색 잎사귀 사이로 눈꽃처럼 하얀 꽃을 무성히 내밀었다.


아파트를 둘러싼 녹지로 들어서자 아카시아 꽃이 반갑게 인사한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시골에서는 과수원길 방천길 산 비탈길 할 것 없이 동요 가사처럼 '하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고, 향긋한 꽃냄새는 솔바람 타고 솔솔' 날아와서 코끝을 간지럽혔었다.

길 옆 초지의 꽃이 진 민들레는 줄기 끝에 솜사탕처럼 둥글게 품은 씨앗을 멀리 실어갈 센 람을 기다리고 있다. 점점이 하얀 꽃을 피운 토끼풀 군락지는 푸른 하늘에 은하수가 흐르는 듯하고, 그 사이사이에 간간이 핀 조밥나물 꽃은 노란색이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다. 옥스아이 데이지 꽃은 영락없이 팬에서 갓 나온 한쪽만 익힌 계란 프라이(sunny-side up)를 닮았다.


'세계평화의 숲' 부근 숲에서 순박한 얼굴의 하얀 찔레꽃이 산책길로 고개를 살며시 내밀었다. 해가 진 어스름 녘에 보는 찔레꽃은 어느 노래꾼이 부른 노래 가사처럼 또는 그의 애절한 목소리 마냥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러운' 듯도 하다. 어떤 냄새가 슬픈 감정을 일으킬까 만은 그는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라고 노래한다.


허리 높이 키의 붉은 토끼풀도 모여서 자라는 습성을 잃지 않고 산책로 옆에 군락을 이뤄 무성히 늘어서 있다. 본능과 습성에 따라 생장하는 것이 어디 저 풀뿐일까? 사람도 그가 속한 습속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먼저 밝고 선한 습속이 정착되어야 건전한 사회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해당화는 산책길에서 멀찍한 곳에 물러서서 두 세 송이 꽃을 피웠다. 서늘한 저녁 바람에 옷깃을 여미듯 풀 먹인 모시처럼 질박한 빛깔의 소박한 꽃잎을 잔뜩 움츠리고 있다. 그 옆 붉은 병꽃나무의 녹색 잎사귀와 붉은 꽃은 발랄한 아가씨처럼 윤기가 흐르고 생기가 넘쳐 보인다.

제철도 아닌데 풀숲에 핀 하얀 꽃잎에 노란 꽃심의 구절초 두어 그루도 눈에 띈다.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라던 박용래 시인의 시 「구절초」를 입가에 맴돌게 하던 어느 가을, 경내에 구절초가 만발하던 삼 년 전 성거산 기슭 만일사가 떠오른다.


꽃말 '기다림'처럼 누군가의 눈길을 기다렸다는 듯 가지마다 한 송이씩 노란 꽃을 단 죽단화도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지난 초파일 칠보산 자락 무학사 부근 산길에 만개했던 죽단화가 오버랩된다.


오월의 여왕 장미도 잎사귀 사이에 가시를 숨긴 채 연분홍 꽃잎을 다소곳이 움츠리고 있다. 여러 꽃들과 함께 무리 지어 있어서인지 담장 너머로 앞 다투듯 무성한 넝쿨을 드리운 농염한 여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달콤한 향기를 가진 라일락처럼 물푸레나무 과에 속하는 정향나무는 가지 끝마다 나팔처럼 긴 자루의 꽃을 수북이 달고 있다. 장미, 죽단화, 찔레나무, 해당화가 모두 장미과에 속한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이들은 생물의 8단계 분류체계 '종-속-과-목-강-문-계-역' 가운데 아래에서 세 번째인 과(科, family)가 같으니 가까운 친족끼리 모여 서식하는 셈이다. 물푸레나무 과에 속하는 이팝나무와 정향나무도 마찬가지다. 이 작은 공원의 숲은 가히 꽃나무들의 집성촌이랄 만하다.

앵두공원 부근에서 방향을 바꾸어 영마루공원을 가로질러 숙소로 향한다. 루피너스, 팬지, 데이지 등 이국적인 꽃들로 단장된 큰 화분들이 공원 중간중간 놓여 있다. 어둠에 묻혀 미처 알아보지 못했을 꽃도 있었겠지만 짧은 저녁 산책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많은 종류의 들꽃을 만났다. 화단이나 나무 숲 사이 여기저기 고양이들이 몸을 웅크린 채 밤을 맞이하고 있다. 호젓한 봄날 밤이다.


일기 속 지난해 봄날의 평범했던 일상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산천은 목련, 벚꽃, 진달래, 개나리, 라일락 등 온갖 꽃들이 봄의 축전을 벌이고 있다. 온 국민들의 슬기로운 대처로 코로나 19 사태도 이제 고비를 넘기려 하고 있다. 어서 빨리 예전에 겪어 보지 못했던 역병에 빼앗긴 찬란한 봄날을 되찾기를 간절히 고대해 본다. 화단의 매화가 더디 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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