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겨울이 그 끄트머리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아파트 베란다 창 너머로 보이는 청계산은 희끗희끗 잔설을 이고 있었다. 그 해 이월 초순 급작스럽게 발령 소식을 접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옷가지 등을 가방에 챙겨 넣고 KTX 광명역을 출발해서 발령지 부산으로 내려갔다.
서글프게만 느껴지던 객지 생활도 벌써 다섯 달 넘어 몸에 익어갔다. 금요일이면 퇴근 후 부산역에서 집으로 가는 상행 열차를 타는 것이 주간행사가 되었다.
여느 금요일과 마찬가지로 그날도 퇴근시간이 지나자 사무실 자리를 서둘러 정리하고 중앙역에서 전철을 타고 부산역으로 갔다. 대합실 입구 어묵가게에서 어묵 두 어 개로 출출해진 배를 달래고 서둘러 열차에 올랐다.
텅 비었던 16호 열차 객실 좌석들이 하나 둘 채워지자 부산 발 서울행 고속열차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플랫폼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열차 승객은 대부분 여행을 가거나 나처럼 주말을 앞두고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인 듯했다.
통로 건너 옆 좌석에 젊은 남자 하나,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가 아닌 남자’와 함께 기차를 타 본다는 아가씨, 주말을 앞두고 여행을 가는지 나란히 앉았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 ‘남자’와 처음으로 여행을 간다는 그녀의 들뜬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부산역을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젊은 아가씨가 어디서에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뭐 블루가 죽었다고?"
휴대전화로 ‘블루’의 죽음을 전해 들은 그 아가씨, 갑자기 서럽게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블루'의 죽음 소식에 호들갑스러운 그녀의 슬픔은 주위 사람들을 의식할 틈이 없나 보다. 주위 승객들은 아랑곳 않고 큰 소리로 통화하는 내용이 그대로 들려온다.
그녀 주변에 앉은 승객들은 ‘블루’가 그녀 가족일까, 친구일까, 의아해하면서도 그 누구의 ‘죽음’에 마음이 무거워진 표정들이다.
고속열차는 시속 삼백 킬로미터의 무시무시한 속도로 들판과 산비탈과 마을과 터널을 순식간에 하나 둘 스쳐 지난다. 주변 승객들은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통화하는 그녀 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뭐? 떡이 목에 걸렸다고? 어떡해, 난 몰라!"
기차역으로 나오기 전에 아침으로 먹인 떡이 목에 걸린 ‘블루’, 그 애완견의 죽음에 그녀는 좀체 슬픔을 주체할 수 없나 보다.
이쯤에서 승객들은 ‘블루’가 그녀가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임을 알아챘다. 그리고 대책 없이 입가로 삐쳐 나오는 미소, 그녀에게 들킬까 봐 민망한지 하나 둘 서둘러 손으로 입을 가리기 바쁘다.
그녀 남자 친구도 웃음을 참기 힘들었나 보다.
“뭐가 우스워!” 앙칼진 그녀의 다그침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남자 친구 모습도 안쓰럽고 우습다.
고속열차는 비극인지 희극인지 애매한 연극 같던 상황에는 무관심한 듯 지치지도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내달린다.
순진하고 여린 그녀의 감성도 열차처럼 빠르게 지나는 시간에 실려 무뎌지고 흔적도 없이 곧 사라져 가겠지. 그래서 고속열차처럼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 아쉽고 밉고 야속하고, 그 시간을 다투는 현실이 서글플 따름이다.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