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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Dec 03. 2020

포르투갈판 어죽! 이국에서 느끼는 고국의 맛.

두 아버지의 이야기.

오늘 아침, 장장 한 달 가까이 '밥다운 밥'을 먹지 못한 아빠가 드디어!! '김치찌개 적색경보'를 내렸다.


"입안에 까끌한 빵이 굴러다니는 것도 깝깝한데 아무리 양치를 해도 미끌한 버터향이 당최 가실 기미가 없어."


"이렇게 빵으로 속이 부대낄 땐 곡끼(쌀밥)이랑 얼큰한 김치찌개를 먹어야 속이 내려가지 안 그러면 밀가루에 속이 쓸려, 베려 버린다구."


'알아. 아빠. 나도 이해해. 아빠 마음 다 아는데 왜 하필 귀국 3일을 남긴 이 시점에서 김치찌개를 찾으셔....'


'지난 시간 잘 참고 견디신 거 이왕이면 끝까지 참아주시지, 여행 막바지에... 이러면 나 괜히 억울해..'




부모님을 모시고 하는 뚜벅이 자율 배낭여행의 힘겨움 중 하나가 바로 음식이란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우리 아빠를 향한 이야기일 줄은 몰랐다. 그동안 한식을 못 드신 것도 아니었고 ( 장장 30킬로 수화물 가방 하나가 모조리 한식으로 채워졌으니) 빵이라고 해봐야 고작 하루 한 끼가 전부였는데.

그런데도 김치찌개를 찾으면 이건 분명 옐로카드 감이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은 변수의 연속 이라더니 그 말이 틀린 게 하나 없었다. 안 그래도 오늘 저녁은 특별하게 '파두' 공연을 보며 밥 먹을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는데.... 아빠의 반칙 때문에 파두 공연에 쓸 돈이 김치찌개에 들어가게 생겼으니 에라이.... 김이 팍팍 새 의욕이 사라진다.


벌써 서너 번은 먹었을 김치찌개를 딸 눈치 보며 참고 또 참다 이제야 얘기하는 아빠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장장 한 달 가까이 각고의 노력으로 잘 버티고 계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막상 한국에선 만원도 안 되는 김치찌개에 2~3만 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깝고 억울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확실히 아빠랑 하는 여행은 엄마보다 어렵고, 까다롭고, 또 예민하다며 입을 삐쭉 내밀고 숙소 주변에 있는 한식당을 찾자 딸내미 말에 눈치를 보던 엄마가 참았던 한 마디를 하셨다.


"김치찌개는 무슨 김치찌개야. 한국 들어가면 내내 먹을 찌개 놀러 와서까지 먹어야 돼? 이상한 양반이야 진짜. 이제 곧 한국 가는데 고걸 못 참고 비싼 한국 식당 가서 돈 쓰느니 공연이나 보러 가지. 꼭 분란을 만들어요."


역시! 내 맘을 알아주는 건 우리 엄마밖에 없다!

딸내미 주머니 사정, 입장 생각해서 될 수 있으면 돈 쓰지 않고, 힘들게 왔으니 가능하다면 현지의 문화를 체험하는 게 좋다고 말하는 엄마가 참으로 고마웠다. 하지만 나 좋자고 창밖만 바라보며 씁쓸해하는 아빠를 모른 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치찌개냐 파두 공연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러다 번뜩! 머리를 스쳐 가는 게 있었으니. 일명 포르투갈식 해장국.

라면+매운탕+국밥의 느낌으로 영혼까지 개운허게 풀어 준다는 포르투갈 전통 '쌀(밥)' 음식.


'그래! 해물밥! 그거 먹으러 가면 되겠네.'



아빠의 등쌀에 이른 저녁을 먹고자 우리나라 명동과 비슷한 느낌의 아우구스타 거리로 나갔다. 숙소와 가까워 벌써 며칠을 틈 날 때마다 오고 가는 거리라 제법 주변이 익숙해졌음에도 건물과 벽에 수놓아진 '아줄레주'는 볼 때마다 새롭게 아름다웠다. 오후 햇살을 받고 빛나는 타일을 보며 어쩜 이리도 한결같이 이쁠 수 있을까 감탄하던 중 이제 막 브레이크 타임을 끝내고 거리에 테이블을 내놓으며 오픈 준비에 한창인 식당이 보였다.


입간판엔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씨와 사진이 담겨 있었지만 이 뚝배기 사진! 이거 하나면 낯선 메뉴들 사이에서도 해물밥을 찾을 수 있었다.


Arroze de Marisco.

(sea food rice). 그래! 이거다!


미쳐 다 펴지도 않은 테이블보 위에 서둘러 식기들이 준비되었고 잠시 후 접시마다 돈을 내야 하는 악명 높은 포르투갈의 밑반찬들이 (식전 빵, 올리브, 버터와 각종 스프레드 등등이 모두 유료이다) 테이블에 채워졌다.


"근데 그 해물밥인가 그거는 빠엘롱(아빠가 빠에야를 부르는 소리)이랑 어찌 다른 거야?"


빵 때문에 속이 쓸려 힘들다던 아빠가 준비된 식전 빵에 버터를 바르며 물었다.


"나도 이름만 들었지 정확히 어떤 재료로 어떻게 조리되는진 몰라요. 그런데 찾아본 바로는 해물 육수에 쌀을 불려 넣고 거기에 토마토와 파프리카 가루, 갖은 야채와 해산물을 듬뿍 넣고 푹 끓여 만든 요리래여. "


"들어보니 빠엘롱하고 비슷하겠구먼. 옆에 붙은 나라니까 음식도 비슷한가 보네."


" 해물밥은 빠에야랑 좀 다를걸요. 우선 해물밥은 빠에야 보다 국물이 훨씬 많고 파프리카 가루 때문에 고춧가루 푼 것 같은 칼칼한 맛이 난다니까."


" 만드는 게 꼭 어죽이랑 비슷한 느낌이네! 어죽도 생선하고 시래기 갈아 넣고 뭉근하게 끓이다가 쌀 넣고 죽 끓이듯 만들잖아. 김 팔팔 나는 거 후후 불어 한 그릇 먹고 나면 등줄기에 땀이 줄줄 나면서 속도 풀리고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는데. 포르투갈판 어죽도 그럴라나. "



드디어! 고대하던 해물밥이 윤이 나는 갈색 뚝배기에 담겨 아빠 앞자리에 놓였다. 곧이어 뜨거울 수 있으니 조심히 먹으라는 직원의 당부와 함께 굳게 닫힌 뚜껑이 열리자 뜨거운 김과 함께 칼칼한 향기가 사방으로 퍼지더니 잠들어있던 후각 세포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해물 국밥의 모습을 하는 것도 놀라운데 국물을 한 숟가락 후루룩 떠먹으니 이건 뭐.... 완전 한국 음식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그 개운함은 또 어떻고. 어떤 독한 술을 마셔도 곧바로 해장이 될 것 같은 맛깔난 얼큰함이 온몸을 전율하게 했다. 이국에서 느끼는 고국의 맛이라니.


당당하게 스테이크를 외친 엄마와 딸내미의 숟가락이 연신 뚝배기를 들락거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얼큰하고 뜨거운 뚝배기 맛에 반하지 않을 한국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엄마가 해물밥 하나를 더 주문하신다. 


"이쯤 되면 포르투갈의 원조는 빵도 아니고, 에그 타르트도 아니고 무조건 해물밥인데? 글치 아빠?"


"......"


방금 전까지 속 푸는데 김치찌개가 최고라고 말하던 아빠는 어디 매로 가시고 혹여 뺏길세라 말 한마디 없이 해물밥 삼매경에 빠진 분만 계신지. 식탁 위 어떤 음식도 마다한 채 뜨거운 김이 펄펄 는 해물밥을 말없이 드시며 속을 풀고 있는 아빠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얼마나 얼큰한 국물이 드시고 싶으셨음 저리 말도 없이 드실까..'


해물밥도 이렇게 잘 드시는데 김치찌개였음 더 잘 드셨으려나.

에잇! 그깟 김치찌개 얼마나 한다고 그걸 못 사드렸나 싶어 내일은 꼭 김치찌개 먹으러 가자고 말씀드리는데 손을 휘휘 젓더니 하시는 말씀.


"아이고! 아서라. 이거 김치찌개 저리 가랄만큼 맛있다. 느끼한 속이 뻥! 하고 뚫리는 게 빠엘롱이 그건 밥도 아니다!"




해물밥의 매력에 푹 빠져 땀을 한 바가지 쏟아낸 아빠가 후후 숨을 몰아쉬며 배를 내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직원이 여분의 냅킨을 들고 와 식사가 어떤지 물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맛있다고 말하자 그럴 줄 알았다며 이 동네에서 해물밥만큼은 자신의 집이 원조라고 말을 하는 그의 표정에 자긍심이 묻어났다.


내일도, 또 모레도. 한국에 돌아가는 날까지 반드시 오겠다는 말을 하려는데 이 사람. 자리를 뜰 생각도 안 하고 뭔가 복잡함이 담긴 시선으로 감자튀김을 먹고 있는 딸내미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뭐랄까. 딱히 불쾌한 시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귀여워 바라본다기보다는 뭔가 더 복잡하고 미묘한 눈빛이 아이에게 닿았다.


그렇게 몇 번을 더. 아이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는 그의 시선이 왠지 깨림찍하고 불쾌해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데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챈 그가 미안하다며 다급한 사과를 건넸다. 그러더니 셔츠 앞주머니에 넣어둔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다. 얼마를 보고 또 봤는지 모를 만큼 바래진 사진 속엔 감색 빛이 도는 샤리를 입은 여자와 작은 유치를 한껏 보이며 웃고 있는 아이들과 지금보다 젊어 보이는 그가 있었다.


"아이들을 못 본 지 벌써 3년이 되었어요."


"지금쯤 딱 요만한 키로 자랐을 것 같아요. 키가 얼마쯤 된다고 듣긴 했는데 직접 보지 못했으니 작은지, 큰지 알 수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꼬마 숙녀를 보니 우리 둘째와 비슷할 것 같았어요. 손 잡고 걸을 때 두고 왔는데..."


그랬다. 아이를 바라보던 직원의 복잡 미묘한 눈빛은 고향땅에 두고 온,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짐작이 안될 아이들이 보고파서 지었던 눈빛이었던 거다.


방글라데시에서 유럽으로 이주해 온지 5년이 되었다는 그는 처음엔 이탈리아 로마 테르미니역 근처 음식점에서 식당일을 배우다 운이 좋아 이곳 리스본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1년만 더 고생하면 자리가 잡힐 것 같다며. 그땐 그리운 가족들을 모두 포르투갈로 데려올 수 있을 거라 말하는 그의 표정에 희망이 어렸다.


그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괜스레 밀려오는 미안함에 어색한 미소를 짓자 그 모습을 본 아빠가 직원에게 방글라데시 언어로 말을 걸었다. 내용인즉 '오래전 방글라데시에서 살았어요'라는 뜻 같았는데 불분명한 발음이었겠지만 반가운 고향 말을 들어서였는지 직원이 반색하며 아빠의 손을 잡았다.


그는 마치 오래된 고향 친구를 만난 듯 아빠에게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이민자의 고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가르치는 족족 이해도 잘하고 공부에 욕심이 많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힘든 줄도 모르겠다는 말도 보탰다.


자신의 노력으로 아이들이 본인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는 방글라데시 아버지의 절절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빠가 그의 손을 잡더니 나도 겪어본마음이라 그 심정이 어떨지 짐작이 간다며.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으니 분명 두 아이 모두 아버지를 닮아 좋은 사람으로 자랄 테니 우선은 건강하게 지내야 한다고 위로했다. 그동안 말 못 하고 눌러 담아온 자신의 힘겨운 상황을 이해받아서였을까? 아빠의 이야기를 듣던 그가 고개를 옆으로 끄덕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데. 어째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깡 마른 방글라데시 아버지의 모습에서 30년 전 아빠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걸까?



맛있게 잘 먹었다는 말보다 서로의 앞길을 축복해주는 말을 하며 가게를 나섰다. 고작해야 한 시간 남짓, 길진 않았지만 진심이 닿은 위로 때문이었는지 벌써 한 참을 걸어 나왔는데도 여전히 우리를 배웅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아빠가 발걸음을 멈췄다.


"딸. 미안하지만 아빠 10유로만 빌려줘."


"응? 돈은 갑자기 왜요? "


"응. 저 친구 힘내라고 용돈 좀 쥐어주고 싶어서. 팁 준다 생각하고 쥐어주려고."


"아~ 팁이면 방금 음식값 낼 때 같이 계산해서 따로 안 줘도 돼요."


"아.... 그랬어? 그래도... 말이야. 저 사람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나중에 애들한테 과자라도 사서 보내라 하려고.

가만 보니 예전 생각도 나고 해서....."


"아이고.. 우리 아빠. 옛날 생각나셨어? 아빠 방글라데시 있을 때 우리한테 맨날 그 양철통에 들은 버터쿠키 보냈잖아. 아빠 그거 다 소용없어. 아빠가 있어야 애들은 좋다 하지, 우리처럼 아빠랑 같이 졸업사진을 찍어본 적이 있기를 해. 어디 졸업식만 그랬어? 운동회도 생일도 초등학생 내내 단 한 번을 아빠랑 보내본 적이 없는걸. 상황이 그런데 맨날 과자만 보내봐.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마냥 좋다 하려고. "


"허허. 그랬냐? 난 또 거기서 니들 생각은 나고, 할 수 있는 건 없고 해서. 애들이니까 과자를 제일 좋아할 줄 알고 보낸 거였는데.... 허허"


민망한 듯 말 끝을 흐리는 아빠를 보니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아차!! 싶었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 그 당시의 아빠는 식구들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선택했을 테고, 식구들과 떨어져 겪을 외로움이야 아빠나, 나나 별반 다를 게 없었을 텐데. 그걸 모르고 내가 느낀 서운함에 아빠의 노력까지 단정지어 버리니.


이렇게 돌아갔다가는 마음에 돌덩이 넣어둔 것처럼 두 아버지의 모습이 내내 눈에 밟힐 것 같아 죄송한 마음에 20유로를 꺼냈다. 건네받은 20유로를 귀한 물건 만지듯 고이 쥐고 가게 앞에 나와있는 직원을 향해 달려가는 아빠와 그런 아빠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직원의 모습에서 과거와 현재의 아빠를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아빠도 20유로를 손에 들고 눈물 흘리는 방글라데시 아버지처럼 힘겹게 그리움을 달래며, 눈물 나는 외로움을 견디며 하루에도 수십 번 품에 넣어둔 가족사진을 보며 아픔을 삭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제야 졸업 사진을 함께 찍을 수도, 아빠와 하는 삼각 달리기를 외할머니와 할 수밖에 없던 이유도, 아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왜 아빠가 아닌 양철통에 담긴 과자만 봐야 했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돌아온 아빠가 쑥스러운 듯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딸. 고마워. 덕분에 큰 위로가 됐어."


지금 아빠가 고맙다 말하는 위로는 누구를 위한 위로였을까?

방글라데시 아버지를 위한 위로였을까? 아니면 지난날의 아빠를 향한 위로였을까?


마른나무 껍질 같은 투박한 손에서 전해오는 따스함이 어릴 적 잡은 아빠의 손에서 느껴지던 따뜻함과 같아 놀라웠다. 그 익숙한 따스함이 좋아 아빠와 손을 잡은 채 나란히 걸었다.


아빠와 함께 걷는 길. 누구보다 먼저 비를 맞고 바람을 헤쳐 나갔을 아빠의 세상이 보였다.

앞서 걸으며 가족들이 따라올 길을 다듬었을 아빠에게 더 늦기 전에 말해야겠다.


'아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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