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의 반을 해외 출장으로 나머지 반을 회사 야근으로 돌려막기 하느라 가정엔 항시 부재중이던 남편 덕분에 피박에 광박까지 겹친 독박 육아를 하고 있던 그 시절.
이 시절이 '아이에게 다시 오지 않을 귀여움의 황금기' 였던 것을 모르고 맥없이 지내던 시기가 있었다.
세 시간마다 일어나 수유를 해야하는 육체적으로 고된 시기도 아니었고, 운 좋게도 매일을 잭팟 터지듯 친정 엄마 무료 찬스를 이용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힘들다 말하는 게 욕심이었던 그런 시절.
뒤늦은 육아 우울증이었는지, 남편의 말처럼 호강 끝에 부리는 억지였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난 알 수 없는 허탈감 때문에 매일을 쭉쩡이가 된 기분으로 살아야 했다.
부는 바람에, 내리는 비에 중심을 잃고 흔들리며 나 자신 스스로를 굴러 다니는 쓰레기보다 가치 없다 느끼며 우울의 가도를 질주하던 그때, 그분들을 보게 되었다.
'삶의 열정이 무엇인지 몸소 실천하던 그분들을'
1박 2일을 기획한 나영석 PD가 새롭고도 신박한 예능을 선보인다고 했다.
그 당시 나영석 PD가 쓴 책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를 읽으며 다시한번 1박 2일에서 보여준 그의 저력을 확인하던 중이었기에 여러 매체에서 극찬해 마지않는 이름하야 '꽃보다 할배' 를 나 역시도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그래 봤자 평균 연령 70세가 넘는 할배들이 뭘 얼마나 보여주겠어, 예고편 만으로도 그분들의 관절이 걱정될 지경인데 흥이 난들 노인정 잔치 수준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그런데 웬걸.
방송을 열어 보니 아무리 믿고 보는 프로듀서가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건 뭐 21세기를 뒤흔들 위대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하고도 감동적이지 않는가.
어떻게 웃고 넘기는 예능에서 존경과 경외심이 그리고 감동이 쉬지 않고 번갈아 올 수 있는지. 쉬다 걷다를 반복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노년의 열정이 어찌 그리도 뜨겁게 달궈질 수 있는지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워질 수 있는지.
수도 없이 감동을 반복하며 방송을 시청했었다.
그렇게 모든 회차가 끝나고 여전히 당신들의 자리에서도 열정을 놓지 않는 할배들을 본 뒤에야 깨달았다.
'아.. 나는 내 인생을 열정이라는 뜨거운 불꽃에 쉼 없이 담금질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구나. 그게 그리도 간절했던 것이구나. 그걸 하지 못해 그렇게 맥없이 지내 왔던 거구나.'
꽃보다 할배 덕분이었다.
그 덕에 정열적으로 살아가며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다 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도,
다음 해 4월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를 기점으로 황혼의 그분들을 통해 얻은 용기를 무기로 매해 아이를 데리고 유럽으로 떠나게 된 것도,
꽃보다 할배의 포르투갈 편을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먹을 때마다 오돌뼈 씹는 소리가 나는 에그타르트를 반드시 먹어보겠다고 다짐한 것 모두가 말이다.
"딸아, 그냥 아무거나 타고 가지 이 더운 땡볕에 무얼 또 기다리는 거냐."
벌써 트램 몇 대를 보내고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내게 아빠가 물었다.
뼛속 깊이 한식 파인 아빠였으니 에그 타르트 따위 계란빵과 동급이었을 텐데 굳이 그걸 먹자고 이 더운 날 눈앞에서 트램 몇 대를 보내버리는 게 이해가 안 될 건 당연했다. 하지만 우린 리스본에 왔고, 리스본 하면 28번 트램 아니던가.
리스본의 낭만을 느끼려면 당연한 공식처럼 28번 트램을 타야 하는 거였다. 그러니 기다리는 게 당연한 거였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하다. '파스테이스 디 벨렝( pasteis de belem)'으로 가려면 분명 이 정류장이 맞다고 했는데 어째서 낭만 트램 28번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 걸까?
구글맵 이번에도 날 실망시킬 텐가?
아무리 기다려도 개나리 노란 트램은커녕 지저분한 그라피티 가득한 트램만 주구장창 섰다 떠난다.
이상하다 싶어 다시 한번 구글맵을 확인하는데.
이런. 우리가 타야 할 트램은 '넘버 15' 란다.
28번 트램은 타는 곳도 다르고 가는 곳도 다르다는데 나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엉뚱한 장소에서 틀린 트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이쯤 되면 시간 될 때 머릿속에 내비게이션 하나 필히 심어둬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데 눈앞에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15번 트램이 보였다.
"다들, 이거야! 이거! 이거 빨리 타야 햇!"
실수한 게 들킬까 얼렁뚱땅 식구들을 태우긴 했는데, 역시나 눈치 빠른 엄마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와 함께 '얘는 대체 누굴 닮아 길도 못 찾아 지도도 못 봐 심지어 왼쪽 오른쪽까지 헷갈리는지 모르겠다'며 촌철 팩트를 건네주셨다.
내가 봐도 엄마 아빠 둘 중 누구도 길치는 없는데 그럼 대체 뭔가? 숨겨진 탄생의 비밀이라도 있는 것인지 궁금해하는데 창 밖으로 여행 오기 전 수없이 봐왔던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드디어 왔구나.'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파스테이스 디 벨렝( pasteis de belem)' 은 소문대로 매력 만발, 인기 만발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입구에서 출발한 줄은 끝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 아무렴, 오디오 사운드를 뚫고 나오는 그 빠득! 거리는 소리 확인하겠다고 온 나 같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어'
이 정도 인기면 안 먹고 그냥 갈 수도 없었다. 기다림이 두려워 포기하고 돌아간다면 두고두고 후회할게 뻔했다. 그러니 줄이 아무리 길어도 우선 서고 봐야 했다. 하지만 아빠는 생각이 달랐는지 한 숨부터 내쉬었다.
"아휴.. 그 계란빵을 꼭 먹어야 하는 거야? 난 그거 맛도 없어 보이더구먼. 아빠는 엄마랑 윤이랑 근처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정 먹고 싶거든 너만 먹고 오는 건 어때?"
"아빠! 계란빵이라니? 설마 포장마차에서 파는 그 계란빵을 생각하는 거야? 우리 꽃보다 할배에서 봤잖아. 동그란 페스츄리 안에 커스터드 크림이 예...ㅅ"
"아이고. 그래그래 알겠다 알겠어. 나한테는 그게 그거지만 아무튼 먹어야 되면 먹기는 하겠는데 저 줄이 줄어들긴 하는 거냐?"
고민이 됐다. 나에게는 꼭 한 번 먹어봐야 할 타르트였지만 아빠에겐 고작해야 포장마차 계란빵에 불과한 타르트를 저 붐비는 틈에 끼여 사는 게 옳은 걸까?
누가 새치기라도 하는 건지, 불쾌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계산대 근처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보자니 오돌뼈 소리고 뭐고 줄만 서다 오늘 하루가 끝날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무턱대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미로처럼 꼬불꼬불 얽힌 카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게 웬 떡인지 비어있는 테이블이 많았다.
이럴 땐 센스 있게 손님의 부름을 기다리는 인상좋은웨이터를 살포시 부르는 거다.
"실례해요. 네 명이 함께할 자리를 원하는데요.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요?"
"그럼요. 여기서 먹고 갈 거 맞지요? 포장만 하려면 계산대에서 따로 주문을 해야 해서요."
'당연한 소리. 얼마가 됐든 편히 먹을 수 있다면 그까짓 봉사료 감사히 낼 준비가 돼있다니까요!'
혹여 웨이터의 마음이 변해, 아니면 이미 예약된 자리니 다시 줄을 서야 한다고 말할까 싶어 서둘러 메뉴를 주문했다.
묻고 따질 것 없이 카푸치노와 에그타르트의 본 명 '파스텔 드 나타 (pastel de nate)' 다.
대체 어떤 공간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자리한 이 공간은 난장판에 가까운 입구 쪽 계산대와는 달리 평화롭고 고즈넉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에어컨을 튼 것 같지 않은데 생각보다 시원하기도 했고, 조용했으며 포근히 밝았다. 이상한 곳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는 몽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주문한 에그 타르트와 음료를 가져오는 웨이터가 보였다.
"여기 있어. 맛있게 먹어.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만약 포장이 필요하다면 나에게 말해. 밖은 사람이 너무 붐비니 내가 대신 주문해서 가져다줄게."
"오 마이 갓. 오브리가도!!"
기본 서비스인가? 아니면 노약자 세분을 위한 그의 친절한 배려인가 고민하던 순간 보기만 해도 그 맛이 식빵 위에 덜 익은 계란찜 올려 먹는 맛과 비슷할 것 같다며 미간을 찌푸리는 아빠가 보였다.
방송에서 봤던 에그타르트는 커스터드 크림이 적당히 그을린 짙은 캐러멜색이었는데 이건 뭐 그을리다 못해 검게 타 버린 것처럼 보이는 데다 그 때문에 크림이 꾸덕져 보이기까지 하니 아빠의 염려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그래도 아빠. 그 신구 할배가 그렇게 맛있다고 극찬하며 먹은 거니까 분명 빈 말은 아니었을 거야.'
그러니 믿고 드셔 보라며 따끈한 타르트 하나를 집어 미간을 잔뜩 좁힌 아빠에게 건넸다. 그 모습이 유난스러워 보였던지 엄마의 찰진 한방이 날아왔다.
" 이봐요. 윤이 할아버지. 아니 그 전날까지 대항해 시대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사람은 모험심이 많아야 성공한다고 하더니 왜 한 입 갖고 두말을 해요? 색다른 거 먹는 것도 모험심의 하난데 해보지도 않고 인상 먼저 쓰고 있고 이상한 사람이야 진짜."
"그래 할아버지, 나 보고는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하더니. 할아버지 겁쟁이네. 크크크"
엄마와 손녀딸의 총공격에 자존심이 흔들렸던 걸까? 아빠가 두 눈을 질끈 감더니 캬라멜향이 솔솔 풍기는 타르트를 입으로 욱여넣었다.
한 입 앙! 빠득! 빠득!
'그래. 이 소리였어. 에그타르트를 먹는 할배들 주변으로 깔린 생생한 소리가. '
아빠의 반응이 궁금해 손에 든 타르트를 먹지 못하고 있던 엄마가 아빠의 표정을 살피더니 내게 눈을 찡끗 거리며 신호를 보냈다. 아빠의 식성을 잘 아는 엄마였으니 지금과 같은 반응은 100점 만점에 100점이 분명하다는 합격 신호였던 것이다.
"아우... 야.. 이게.. 이게 뭐라고? 계란빵이라고?"
"아니, 할아버지 에그 타르트라고. 에그 타르트. 자 따라 해 봐 에 그 타 르 트."
"히야.. 이건 어떻게 만들었길래 과자같이 빠삭 거리다가 순식간에 녹아 버리냐? 허허 참. 그 할배들 방송에서 거짓말 한건 아닌가 보네. 하나 더 줘봐라."
그제야 두 근 반 세근반 뛰던 내 심장은 정상 박동을 되찾았다. 아빠의 신호로 모두가 한 입씩 '파스텔 드 나타'를 입에 넣었다.
'빠득! 빠득! 꺄도독! 깨도독!'
침묵 속에 바짝 말려 구워진 페스트리 부서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그리고 뒤를 이어 보드라운 구름이 입안을 감싸는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됐다.
'이러니... 커스터드 크림을 만드는 장인이 고작해야 세 명이 전부지. 비법을 공유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어.'
한 사람당 타르트 3개씩을 끝내고도 뭔가 아쉬워 숙소에서 먹을 타르트를 웨이터에게 주문했다. 계산서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가 불쑥 떠오른 생각이 있다며 말해도 되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응...... 그 할아버지들 나오는 그 프로 말이야. 거기에 나오는 할아버지 한 명하고 우리 할아버지하고 되게 똑같아서. 그런데 누군지 말하면 할아버지가 서운해할 것 같아."
"아니, 어느 할아버지랑 닮았다고 말하려고 할아버지 기분이 나쁠 거라 생각해? 뭐 어때. 말해봐. 할아버지는 다 이해해 줄 거야."
"응. 크크크. 그 신구 할아버지 말이야. 그 할아버지랑 내 할아버지랑 똑같이 닮은 거 같아. 그 신구 할아버지 술 되게 좋아하잖아. 여기 가도 술 마시고, 저기 가도 술 마시고, 그게 꼭 우리 할아버지랑 똑같아서."
"컥! 켁켁켁!"
아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빠는 엉뚱한 손녀딸의 발언에 먹고 있던 에그타르트를 손에서 놓치고는 사래에 걸렸는지 켁켁 거리기 시작했다.
"어머어머. 얘 눈썰미 좀 봐라. 할머니도 딱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쩜 우리 손녀딸은 할머니랑 텔레파시가 잘 통할까? 사람 좋은 웃음 하면서도 조용히 소주 한잔 찾는 거 보면 나도 신구랑 니아빠 형제 아닌가 싶었다니까? 이왕 닮을 거면 부인 생각하는 박근형이나 닮지. 그중에서 부인 챙기는 건 박근형 밖에 없더만. 닮아도 꼭.. 이그..."
방송에 나온 에그타르트를 먹겠다는 소박한 이유 하나로 식구들 몰아가며 이곳에 왔다는 게 모양 빠지게 없어 보여 과연 잘하는 일일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만족을 해주다니 감사의 흥이 절로 났다.
"아빠! 생에 첫 에그타르트를 드셔 본 소감이 어때? "
"역시. 인생은 도전과 모험의 연속임을 느꼈지. 이거 안 먹었음 에그 타르튼지가 계란빵 하고 똑같다고 말할 뻔했지 뭐냐. 허허허. "
그동안의 나는 '자아 성찰'이나, '깨달음 얻기' 같은 원대한 이유를 달고 하는 여행만이 그럴싸한 여행, 즉 여행 다운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단순하게도 '방송에 나온 에그타르트를 먹어보겠다는 일념 하나 만으로' 리스본에 오게되었다.
처음엔 그 이유가 말할 수 없이 초라한 것 같아, 왜 포르투갈에 가게 되었냐는 주변의 질문에 '낭만을 찾으러요.'라는 되도 않는 답을 하며 얼버무리곤 했는데 막상 에그 타르트를 먹어 보니 단순한 이유도 충분한 이유가 될수있다는걸 깨닫게 되었다.
'때론 사소하고 단조로운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멋들어진 여행을 만들수 있어야 함을,여행자라면가끔은 그런 싱겁더래도 담백한 여행을 계획하기도 해야 한다는것을.'
여행은 그렇게 갖은 원인을 버무려야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단순한 이유 하나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으니까.
에그타르트를 들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꽃보다 할배' 정규 방송을 모두 챙겨 보고도 재방송을 다시 돌려본 시청자로서 아빠와 가장 닮은 할배를 찾아봤다.
'우리 아빠는 신구 할배 + 순재 할배가 맞았다. 술을 좋아하는 인텔리전트 할배의 모습. 그게 우리 아빠다.'
*보태는 글*
브런치를 시작하고 즐겨 읽으며 감동 또한 넘치게 받았던 작가님이 계셨어요. 알고 보니 제가 사랑해 마지않던 '꽃보다 할배' 작가님 이시더군요. 그분의 글을 읽으며 무한한 감동을 받았고, 그분이 제 글을 읽어줄 때엔 짜릿한 쾌감에 온몸을 떨며 감사했더랬어요. 인사하고 싶었고, 아는 척 하고팠지만 괜한 부끄러움에 그러지 못했네요. 하지만 마음만은 여느 팬심보다 깊다는 걸 전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