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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Dec 17. 2020

들어는 봤나? 글루타민산 나트륨 관광이라고.

감칠맛 나는 여행을 위해 조미료 한 스푼!

이것은 반란이다! 아니 반전인가?


아무리 생각해 엄니께 실수를  기억이  없는데, 오늘 내가 뱉은 말이라곤 오늘 일정을 설명한 것 밖에 없었는데, 숙소 분위기를 한냉전선 꼭대기로 몰고간 엄니께서 아니나 다를까 시베리아 냉풍을 쏘시며 관광 포기 선언을 하셨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지난 양산 사건을 빼고) 이 여행의 설계자이자 주동자인 나를 향한 전폭적인 지지를 멈추지 않고, 아빠의 틈새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었으며, 단단한 방어막 역할을 했던 엄마가 방금 나를 버린것이다.


오랜 시간 집 떠나 하는 여행이었으엄마힘든 마음에 별 뜻 없이 하신 말씀 이었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루 걸러 한 분씩 딸내미 애간장을 태우는 건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 아침 댓바람부터 돌아다니는 것도 겨우 따라가는 건데 그걸 모르고 남들 가는데라고 우르르 따라가질 않나, 유명한 맛집이라고 몇 시간 줄을 서질 않나. 아주 엄마 고생 못 시켜서 안달 난 애 같다니까. 여기가 무슨 해병대 캠프도 아니고 남들 간 데만 따라다니면 그게 여행인가?남들 뒤꽁무늬 확인하러 다니는 거지.애가 개성이 없어!"


"그러니까 말이야. 당신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어. 어쩜 이렇게 말을 잘해. 얘가 개성만 없나? 재미도 없어. 그 성당이 그 성당 같더구먼 갔던데 또 가고 사진 찍은데 또 찍고, 좀 쉬었다 가자고 해도 시간 없어 안된다고 하고 뭔 놈의 디립다 짜기만 한 대구를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 먹질 않나...."


"아! 진짜 이러기야? 어제 힘들다고 혼자 식당 가서 퀵 비어 주문한 사람이 누군데.  그리고 그 대구, 바깔라우 요리는 포르투갈 전통 음식 이란 말이야. 다 아빠, 엄마 즐거우시라고 힘들게 정보 찾고 가는 건데 어쩜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


부모님의 뼈 때리는 농담인지, 농담 갖은 진담인지를 듣고 있자니 오죽하면 그러셨을까 이해는 하지만 왠지 모를 억울함이 쌓였다. 누군 편하기만 했는 줄 아나.

나도 불편한 거 참고, 하고 싶은 거 누르고 하는 여행인데 왜 꼭 말을 그리 서운케 하시는지.


욱! 하고 단전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올라왔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차피 시작한 효녀 노릇 끝까지 하는 게 옳지 싶어 다시 한번 엄마와 아빠에게 비굴함을 담아 사정을 했다. 나도 서운한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어쩌랴.

이 여행은 엄마 아빠가 있어야 완성되는 여행인 것을.


어랏?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그래도 엄마인 나를 따라나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딸내미가  내 눈치를 보더니 할머니 품으로 숨어드는 게 아닌가.


'할무니할무니 나도 할무니랑 있을꼬야.'  '오구오구 오냐 우리 똥강아지' 같은 소리를 하며 찰싹 달라붙은 두 사람이 눈에 들어오자 내 안의 쪼잔함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래! 치사하게 3대 1로 공격한다 그거지? 어디 그럼 마음대로 해봐. 나 없이 얼마나 즐거운가 두고 보겠어!'


"알겠어. 배신자 셋이 뭘하든 알아서들 해욧. 난 세 사람 신경 안 쓰고 놀다 올 테니 저녁도 알아서들 해결하고욧!"


침대 위에 똘똘 뭉쳐있는 세 배신자를 노려보며 기세 좋게 소리치며 나오긴 했는데, 기세와는 다르게 왜 이리 서럽고 또 억울한 걸까.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으니 그럴만도 하지. 분하고 원통 눈물이 나올랑 말랑 하던 찰나 출근중인 마리아와 마주쳤다.


오늘은 왜 혼자냐는 그녀의 질문에 울화통을 터트리며 방금 있었던 사건과 집안에 있는 배신자 원, 투, 쓰리에 대해 고자질을 하니 정말 재미있는 가족이라며 손뼉치며 웃는다. 너 즐거우라고 한 얘기가 아니라며 나 진짜 속상하다고 하소연을 하자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떤지 물으며 빨간 브로셔 하나를 건네주는데.


이름하야 'sightseeing bus(투어버스)' 브로셔.


"덥지 않고, 힘들지 않고, 편하고. 어때? 이거야 말로 지금 너에게 가장 필요한 해결책 아니야?"


나쁘진 않은데 딱히 내가 원한 스타일의 여행이 아니라고 말하자 니가 배신당한 이유를 알 것 같다며 그녀가 웃는다. 뭐가 되었든 혼자 보다는 함께가 나을 테니  반란의 무리를 진압하러 가보자.


"오브리가도(고마워) 마리아!"


계단을 오르면서도 비싸기만 한 관광버스를 굳이 타야 하나 고민하며 숙소로 들어섰는데  배신자의 표정이 가관이다. 내가 깽판이라도 칠것처럼 보였나?!


"엄마! 그 싸잇씽(sightseeing bus) 버스 알지? 관광지 주변에 있던 천장 없는 이층 버스 말이야. 빅 버스(big bus)라고 쓰여있기도 하고. 홉온 홉 오프(hop-on, hop-off)라고 쓰여있기도 한 거. 우리 오늘은 그거 타고 리스본 한 바퀴 돌고 와요. 거 타면 24 시간 안에 백번이고 천 번이고 버스에 타고 내릴 수도 있고 버스 숫자도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표 끊은 사람만 탈 수 있으니까 소매치기 걱정도 없고. 또 달리는 동안은 천장이 뚫려 있으니까 시원하고 오디오 가이드 서비스도 있으니까 편하게 관광하기 좋을 거야.  힘들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관광지 한 바퀴 돌 수 있으니까 진짜 진짜 대박이지 않아요? 어때 엄마? 좋은 것 같지?"


"싸이 힝? 싸이? 그 가수 싸이 말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싸잇씽 버스(sightseeing bus)라고 신개념 관광버스라고 생각하면 돼."


"아! 그 싸인지 싸이 힝 인지 그걸 타면 덥고 힘들지 않다는 소리지?"


"그렇다니까. 완전 끝내준다니까!"


나의 열띤 꼬드김에 넘어간 노약자 세 분을 끌고 관광의 시작점인 폼발 광장으로 가자 호객 행위를 하고 있는 관광버스 직원이 보였다. 그에게 거금 60유로를 건네준 뒤 버스 2층으로 오르자 탁 뚫린 시야로 거대한 폼발 후작의 동상이 보였다. 


어디에 앉을까 고민하는 사이 우리 뒤를 이어 세 무리의 관광객이 연이어 올라왔다. 제길! 고민할 시간이 없다. 꾸물거리다가는 자리를 뺏겨 에어컨 없1층에서 찜통 관광을 하게 될 수 있으니 먼저 앉고 보자. 


복도를 사이에 두고 네 식구가 나란히 앉아 버스 기사에게 받은 이어폰의 머리를 의자 등받이에 나 있는 작은 구멍에 넣자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비록 영어이긴 했지만 관광버스가 제공하는 오디오 가이드가 있으니 왠지 모를 흥미가 솟았다.


잠시 뒤 이어폰을 통해 버스기사의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운행 중 지켜야 할 몇 가지 수칙과 가로수 아래를 달릴 때는 자신의 신호에 맞춰 고개를 숙여야지 안 그랬다간 나뭇가지에 매달리게 될 거라는 시답잖은 농담과 함께 드디어 버스는 폼발 광장을 벗어났다.


버스는 리히터 규모 9의 강도로 일어난 대지진과 뒤이어 발생한 해일로 초토화된 리스본의 역사와 대항해 시대를 이끈 긍지로 어려움을 극복해낸 포르투갈인의 위대함에 대해 설명하며 에스트렐라 공원을 향해 달렸다.


' 이 공원엔 동물들을 방목해 키운다는데.... 우리 윤이 데려가면 좋아할 텐데... 내리자고 할까? 싫다 하심 어쩌지? 에이! 복잡해! 모르겠다. 그냥 있자!'

버스가 주요 관광지에 도착할 때마다 내리고 싶은 마음과 인증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요동쳤다. 내가 나와 싸우는 사이 한참을 달린 버스는 몇 군데의 관광지를 거쳐 드디어 리스본의 꽃이라 불리는 벨렘 지구로 들어섰다.


저 멀리 포르투갈의 전성기를 대변하는 대항해 시대의 상징 기념비인 '발견 기념비'가 보였다.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시작한 자리라고 알려져 있으며, 마젤란, 콜럼버스 등 대항해 시대를 주름잡던 인물들이 기념비에 조각되어 있다고 아이에게 설명하자 위인전에서 본 것 같다며 아는 척을 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 이번엔 레이스 밑단처럼 이쁜 벨렘 탑에 대해 설명해주니 역시나 알고 있는 거란다.


그렇게 아이와 도란도란 얘기하던 사이 어느새 버스는 도심을 벗어나자 거대한 수로교를 마주 보며 달리기 시작했다.


"키야~ 이렇게 여행하니까 천국이 따로 없네. 아니~ 따님. 이렇게 좋은걸 이제야 태워주면 어떡해? 진즉 태워 주지. 아부일사병이나 걸리게 하고!"


"그러게요. 아부지. 진즉에 태워 드릴 것을. 이렇게 좋아하실지 몰랐네. 그런데 인증사진 한 장 없는데 괜찮으셔?"


"아이고 사진은 무슨. 내가 기억하면 그게 추억이지. 오랜만에 다리품 안 팔고 시원히 둘러보니 세상 편하구만. 너야 찍사 못해서 아쉽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여유 있는 여행도 해 줘야지. 인생을 여유롭게 만들기 위해 하는 연습이 여행 이라는데 딸내미 너는 여유가 너무 읎어. 여행이 단거리 달리기도 아니고 세상 급해 종종걸음인지. 엄만 그게 안타까워. 음식에 조미료 살살 치면 감칠맛 나는 것처럼 인생도 여행도 조미료 살살 치면서 살아야 하는 거야. 남들이 다 해본 거 따라 하면 어디 조미료 맛이 제대로 나겠어? 남들이랑 다르면 어때? 내 여행이 맛있다는데. 그러니까 따님 남의 말 좀 그만 듣고 우물에서 벗어나세요."




숙소를 나서기 전, 엄마가 말하셨다. 뭐 그리 급급한 여행을 하느냐고. 뭐가 그렇게 급해 쫓기듯 여유 없는 삶을 살고 있느냐고. 여행도 인생도 숨 쉴 틈이 필요한 건 매한가지인데 어째서 넌 한치의 쉼도 내놓지 않느냐고.


그동안 나는 마치 구역마다 영역표시를 하는 동물 마냥 여행 책자나 sns에 소개된 여행지를 찾는 것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그중엔 딱히 마음이 동하지 않는 곳도,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곳도 있었지만 그래도 남들이 간다고 하니, 유명하다고 하니 내 생각은 뒤로하고 인증사진 먼저 찍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남들이 하는 만큼 따라가고 싶었고, 남들이 가는 곳 나도 가봤다며 허세를 부리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남들이 인정한 곳을 따라가는 것이 보편적인 여행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식으로 여행 내내 마음이 조급해지자 함께 여행하는 식구들에게 집중하기보다는 그다음 이동할 장소나, sns에 늘어정보를 수집하느라 혈안이 되어있었고. 그렇다 보니 관광을 마무리 짓고 숙소에 들어오고 나서도 편히 쉬거나 오늘 둘러본 여행지에 대해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오늘 채우지 못한 관광지 할당량을 다음 계획에 집어넣느라 정신이 없었다.


 sns가 기피하는 여행일지라도, 뒤돌아서면 한 두 개 겨우 기억에 남는 관광버스 여행일지라도 함께하는 우리가 만족스럽다면 그 또한 신나는 여행이 분명할 텐데 난 어째서 자신감 있는 여행을 못한 걸까.




엄마가 해준 말 때문이었을까? 이상은 일정 채우느라 급급한 여행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정해진 레시피대로 요리를 해 안정된 맛을 얻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가끔은 그 레시피에 조미료를 살짝 넣어주면 더욱 맛깔난 음식이 되는 것처럼 여행도 그리해야 한다는걸 오늘에서야 깨달았때문에.

그래서. 오늘은 여행에 조미료를 치는 날이니까. 맛깔나는 여행을 위해.


"아빠!엄마! 시원한 맥주 한 잔!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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