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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트 Oct 12. 2021

필름스쿨

집-학교-집-학교-집

1년 동안
정말 수고했어

드디어 졸업이다. 우리들만의 축제처럼 교수님들과 후배들, 그리고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학교 영화관에서 들뜬 모습으로 앉아있다. 엄마와 동생, 제부, 조카들도 함께라면 좋겠지만 그럴 사정이 안되니 아쉽긴 하다. 졸업식의 행사 중 하나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 애니메이션 감독, Paul Boyd를 기리기 위한 'Paul Boyd Class Achievement Award'(장학금 수여식)의 수여자로 이름이 호명되고, 너무 놀라 어떻게 단상 위로 올라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손에는 상장과 상금이 있다. 이는 클래스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달성한 학생에게 수여한다고 하여 더 감격스럽고 뿌듯하다. 그리고 이어진 Scholarships Program 당선자로 다시 불려지니 이게 뭔가 싶다. 마흔이 되고서야, 성취감이란 얄궂은 녀석이 손에 잡히는 듯하고 힘들었지만 남아 있던 열정을 집중해서 쏟아낸 1년간의 밴쿠버 필름스쿨 과정을 잘 마무리하여 기쁘다.


illustrated by 반트 ( cactus* )

   한국을 떠나 에드먼턴-토론토-에드먼턴을 옮겨 다니던 이민가방 2개는 다시 밴쿠버행 비행기를 탄다. 애니메이션 공부를 해보겠다는 꿈 하나로 이민까지 선택하고 온 길인데 계획처럼 되지 않아 아쉬움도 남아 있고, 만나고 있던 녀석과도 미래를 생각할 만큼의 서로의 의지가 다르다 보니 계속 다른 길을 기웃댄다. 그냥 가볍게 학교 정보나 얻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내본다. 포트폴리오를 보내라고 하길래 지난번에 사용한 그림들을 성의 없이 그대로 사진 찍어 보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무나 쉽게 9월 입학이 가능하다길래 되려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이렇게 쉽게 된다고?' 뭔지 모를 억울함도 들고 제대로 확인을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다시 도전하는 게 맞는 걸까? 그냥 에드먼턴에서 다른 공부를 해볼까? 하지만 길게 생각하지 않고 캐나다에 온 이유를 다시 떠올리며 1월 입학을 결정하고 Seat Deposit을 보낸 뒤 Ted와 녀석에게 이별을 알린다.


   2008년 11월 말, 에드먼턴의 모든 걸 정리하고 12월 한 달은 캐나다 온 지 3년 만에 한국 방문을 계획한다. 다행히 출국 전에 학교까지 10분 안에 도착 가능한 방 렌트를 구하고 룸메이트에게 이민가방 보관을 부탁한다. 위치는 더할 나위 없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충분한 시간 동안 과제를 위해 할여할 수 있어 완벽한 거주지라 하겠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딸을 본 그리웠던 엄마는 눈물을 계속 흘리신다. 타지에서 고생을 너무해 살이 빠졌다며 안쓰러운 눈으로 보고 만지고 바쁘시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과 회포도 풀고 기분 좋게 한 달을 보내고 돌아와, 바로 학교 수업을 시작한다. 맛도 없는 나이를 39살이나 먹고 다시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체력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 위로 삼아 보자면, 다 소화하지 못하는 영어임에도 다행히 그림이라 반은 눈치로 수업을 듣는데 못 따라갈 정도는 아니다. 그 사이 쪼끔 늘긴 했겠지라고 자신감도 가져본다. 그렇다고 매일매일 끊임없이 나타나는 새로운 영단어들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꿈뻑꿈뻑 눈꺼풀만 움직이는 날도 허다하다.


   밴쿠버 필름스쿨 (Vancouver Film School)은 사립학교로 영화와 관련된 많은 학과들이 있고 북미에서 꽤나 유명세가 있는 학교지만, 캐네디언(이민자 포함)에게도 부담되는 학비로 유명하다. 모든 프로그램이 6~12개월 코스다 보니 커리큘럼 자체가 아주 빡빡하게 구성되어있다. 어쩜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짧고 굵게 배우고자 할 때 많이 선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Classical Animation 학과는 졸업 작품을 위한 2개 Term을 포함해서 방학 없이 1년 동안 6개 Term으로 이루어져 마치 대학의 과정을 1년으로 축소시켜놨다고 할까? 그러니 과제는 넘치다 못해 여기저기 치여 죽기 일보직전까지 간다. 입학 시기마다 다르긴 하지만, CA72 기수는 총 20명 정도로 시작하여 졸업생은 15명으로, 날밤 새며 애니메이션에 몰입하는 우수한 그룹, 적당한 과제 제출과 적당하게 즐기는 그룹, 버거워 힘겹지만 버티는 그룹, 결국엔 나가떨어지는 그룹들이 각 25%의 비율로 보면 된다. 애니메이션은 상업 미술이고 수백 명의 아티스트들이 공동 작업을 하는 분야이기에 각 파트별 스케줄을 지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여 학교에서 과제 제출 날짜를 어기면 아무리 잘 그려 완성해도 A+는 받지 못한다. 이미 오랜 사회생활로 단련된 터라 적당한 완성도에서 손을 뗄 줄 아는 노련함과, 나이를 무시 못하는 적절한 순발력과, 적당한 시간을 모든 과목에, 또 수면 시간까지 배분하는 기획력이 발휘되어, 오전 9시부터 밤 12시까지 집-학교-집-학교-집을 오가며 열정 그래프를 유지해본다. 하나의 애니메이션(2D) 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프로덕션 파트를 제외한 순수 아트 작업만 나열해도 파트가 많다. 간단히 나눠도 Storyboard,  Design, Build(캐릭터, 소품), Layout(배경), Animation(Key posing/원화, Animation/동화), FX(Special Effects, 물, 불, 빛, 연기, 천의 움직임)가 있고, 그 외에 전체를 총괄하는 Directing, 기획에서 작품의 Concept, Script, Voiceover 등이 있으며, 후반 마무리로 Editing, Sound Effects, Music 등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일을 하는 작업으로 생산되는 예술이기에 학교에서는 모든 과목에 집중도를 나눠야 버텨낼 수 있다. 학과 성적 평균 94.37/100점, 총 25개 교과 중 5 과목 100점, 최저 점수 89점을 받은 Animation 4, 성적표를 받아보니 스스로에게 잘 견뎌냈다고 칭찬하고 싶다. 어린 친구들과의 경쟁 아닌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았음에 충분히 박수를 쳐주고 싶다.


   졸업 후 2개월간 주어진 장학 프로그램 덕분에 앞으로의 걱정을 잠시 미뤄두고, 다시 학교에서 졸업 작품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는 시간을 가진다. 동기들은 다 졸업하고 흩어진 뒤라 애니메이션 룸 한쪽 구석 작은 공간에 제공된 책상에서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 본다. 짧은 프로그램이 끝나갈 즈음, 조교가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 집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Big Bad Boo'에서 Toonboom Harmony(툰붐 하모니/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 훈련을 시켜주고 'Builder'(캐릭터 빌더)를 채용한다고 한다. 당연히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벚꽃이 만발한 3월 봄이 더욱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드는 출근 시간이다. 2주의 프로그램 훈련은 툰붐을 익혀 빌더로서 일을 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너무 신나게 일을 하고 짧은 3개월의 계약 기간이 끝날 때 즈음 프로듀서와 면담을 가진다. 열심히 일해줘서 고맙고 슈퍼바이저의 좋은 평가도 있으니, 다음 시즌이 시작되면 다시 함께 일하길 바란다고 긍정적인 코멘트를 한다. 캐나다에서 처음 이 업계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그 뜻을 한국적인 정서로 받아들여, 일 잘한다는 칭찬으로 여기고 다음 시즌이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나름 성공했구나 착각하면서...




* 선인장 (Cactus)의 꽃말은 '인내'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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