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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트 Oct 13. 2021

크리스틴

기적 같은 찰나

신기하게 다 들린다

핸드폰이 울린다. 왠지 중요한 전화 같다. '앤'을 찾는다. 잘못 걸었다고 답하지만 이상하게 묘한 느낌이다. 다시 걸려온다. 또 '앤'을 찾는다. 혹시나 싶어 '당신이 앤 이라는 말이냐? 아님 앤을 찾는다는 말이냐?'하고 재차 확인한다. '앤'을 찾는다신다. '앤'이 아니다고 확실하게 대답을 한다. 순간 약간의 실망감이 든다. 전화 건너 그녀가 다시 'Kristen Dingman(크리스틴 딩멘) 알아?' 하신다. 아~~ 이거구나! 그 묘한 느낌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알아~ 알지'라고 흥분된 목소리로 답을 하니, 그녀는 순식간에 속사포처럼 영어를 쏟아내신다. 평소 같으면 어리바리하게 못 알아들을 속도인데 신기하게 다 들리는 찰나다. 겨우 이 짧은 통화가 운명을 '또' 바꾼다.


illustrated by 반트 ( winter green* )

   서른 하나, 침대에 누워 막연하게 꿈꿔왔던 그 빛의 시작점은 어느덧 마흔이라는 숫자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공부를 마쳤으니 이제 가족 곁으로 가는 것이 맞는 것일까? 만일,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며 먹고 살아갈 수 있을지? 대단한 성공을 이뤄냈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전혀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부산에서 서울로 오면서 멋진 디자이너가 될 거라 꿈꿨고, 한국에서 캐나다로 오면서 멋진 애니메이션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는 아티스트가 되고자 했지만, 인생은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 이민을 선택한 것은 애니메이션을 배운다는 그 자체로 꿈이 되어 가능했는데, 막상 그 꿈의 끝은 화려하게 상상한 결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인생 그냥 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해보자 마음을 다독여보아도 의욕은 상실 상태로 유지하려 애쓰는 듯하다. 그래도 날씨도 좋고 바다도 있으니 자라온 부산처럼 밴쿠버를 캐나다의 고향처럼 살아보자, 다른데 또 옮기지 말고 여기서 정착하자고 마음을 고쳐본다. 유학의 탈을 쓴 이민자는 진짜 이민자가 되어보려 한다.


   먼저 졸업한 선배들의 소식에 의하면 밴쿠버 동계 올림픽 유치로 정부가 세금을 너무 많이 써서, 애니메이션 업계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굉장히 'slow' 하다 전한다. 이 뜻을 그때는 잘 몰랐는데, 현재 조금 알게 된 이 업계를 보자면 이런 듯하다. 가까운 미국에 있는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 관련 업체들이 캐나다에서 많이 촬영하거나 외주작업을 한다. 미국과 같은 언어를 쓰고 비슷한 생활환경이다 보니 소위 국기만 바꾸어 영화를 찍어도 미국 같은 곳이라, 평소 여름에 캐나다에서 영화를 찍는 현장을 많이 목격한다. 물론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다. 기획은 미국에 있는 큰 영화사들이나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하고, 나머지 제작 과정은 캐나다에 있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의뢰를 하는 즉, 아웃소싱이 비율이 높게 차지한다. 이는 캐나다 정부 혹은 주정부에서 캐나다 자국민을 채용하면, 그들에게 세금 혜택을 해줌으로써 서로 WIN-WIN 한다고 보는 것이다. 아마도 동계 올림픽을 치르면서 세금을 많이 사용했으니, 혜택이 줄어들거나 없어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미국 시장에서 프로젝트를 받아오지 못해서가 아닐까 추측한다. 이런 추측성 이유는 캐나다는 전반적인 디지털 산업 외에도 많은 산업들이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특징이 있어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의리를 지키며 기다리는 시간이 5개월을 지나고 있다.


   밤낮이 바뀌어 게으름을 피울라치면 Kristen(크리스틴)이 전화를 해서는 "Don't be lazy!"라고 따끔하게 혼을 낸다. 무서운 아이다. 그래도 가장 잘 챙겨준 학교 동기이고 애니메이션만큼은 워낙 잘해 졸업 후 유일하게 취업이 된 전형적인 백인 친구다. 간간히 한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전단지 작업을 하면서 렌트비는 벌지만 적극적으로 다른 일을 찾는 것이 두렵다. 크리스틴의 채찍질에 게을러진 몸뚱이를 일으켜 이력서를 보내보지만 답은 없다. 문득 한국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어보겠다 꿈꾸었지만 암울한 시기에 포기했던 그때가 떠오른다. 2010년 애니메이션 시장은 정말 좋지 않다. 그래도 밥 벌어먹었던 일이 그래픽 디자인이라 작은 규모의 한인업체들을 기웃거려보아도, 결국 한인들과 일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한다. (이민자들끼리는 내외하는 것이 이민사회의 일면이기도 하다.) 문득 한국에서 서른 넘어 보던 면접 자리에서, "왜 결혼 안 하셨어요?" "언제 결혼하실 거예요?" 극히 개인적인 질문을 먼저 받는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아시면 알려주세요."라고 멋쩍게 웃어 보이는 '을'이 되어 행동했다. 하지만 캐나다까지 와서 불편하게 한인들과 부딪히고 싶지 않아, 다른 노력을 해보기로 하고 YWCA에서 제공하는 "How to find a job?' 워크숍을 신청한다. 어떤 성격을 소유하고 있는지, 어느 직업에 맞는 성격인지, 캐나다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직업을 찾고, Resume(이력서)와 Cover letter(간략한 자기소개서)를 쓰는 방법과 함께 원하는 회사에 어떻게 컨택하고 인터뷰를 잘하는지를 자세하게 알려주고 훈련을 시켜준다. 3개월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난 뒤의 목표는 밴쿠버 시장에 맞는 호텔 취업이다. Room attendant(하우스키핑)가 그나마 비전공, 무경력 이어도 시도해볼 만한 직업이라 생각하고 준비를 한다. 물론, '환영합니다'며 문 열고 기다리진 않지만 그래도 해보자 용기를 내던 2011년 밝아온 새해 어느 날 전화벨이 울린다.


    "크리스틴 딩멘 소개로 연락을 했어. 여기는 DHX Media 밴쿠버 스튜디오야. 예전 Studio B 알지? 지금 우리 프로덕션은 'Pound Poppies' 시즌 1을 하고 있는데 Builder를 찾고 있어. 슈퍼바이저는 Edwin Poon(학교 강사)이고, 현재로서는 3개월 계약이 될 거야.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니?"라고 쏟아내는 그녀의 말은 정신이 혼미한 상황이지만, 신기하게 필요한 내용은 찰떡같이 잘 들린다. 당연히 "Yes, I'm available."라고 말하니, "그뤠잇! 스튜디오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아~ 크리스틴에게 물어보면 된다."라고 답하니, "알았어, 그럼 스튜디오 와서 계약서 사인하자. 다음 주 월요일에 봐~" "오케이, 고마워!"라고 떨리는 목소리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By the way, my name is Kim!"이라 말하고 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잠시 멍해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워크숍 동기들이 취업이 된 거냐고 물어보며 그런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축하한다고 모두가 함께 기뻐해 준다. 강의를 진행하는 Susan(수잔)이 호들갑을 떨며 작은 스파클링 켜주면서 소감을 말하라고 한다. 저런... 뭐라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한 뒤, "솔직하게 말해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평소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 이런 행운을 가져온 듯하다. 그러니 너희들도 힘내서 원하는 곳에 취업되기를 바란다"며 보기 좋게 포장해 말을 전한다. 모두가 부러운 눈빛으로 부담스럽게 쳐다보지만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는 건지 의아심이 들던 그때, 크리스틴에게서 전화가 온다. 킴으로부터 받은 전화를 설명하니 "전화번호는 알려줬지만 바로 계약서 사인을 하자고 했다고?"라며 되려 묻는다. 갑자기 그러면 그렇지... 제대로 들은 게 아니구나 싶어 '어떡하나~ 소감까지 말했는데... 큰일이네!'라 생각하고 걱정한다. 다행스럽게도, 월요일 스튜디오에 가서 Kimberly Small(킴벌리 스몰)을 직접 만나 인사를 나누고 계약서 사인을 한 뒤 자리를 안내 받고 나니 실감 난다. 아마도 한국어 이름을 알려줬지만 '앤'이라 이해하고 계속 모르는 '앤'을 찾은 모양이다. 이제 다시 기회가 왔으니 결코 놓치지 않아야겠다고 결심에 결심을 거듭하니 왠지 들뜸보다 결연한 마음이 더 강해진다. 크리스틴이 살려 준 운명은 꺼져가던 자존감에 불씨를 넣어 주고, 그렇게 시작한 불꽃은 애니메이션 만드는 아티스트로 죽지 않고 잘 타게 만들어준 것이다. "고마워~ 그대는 은인이야~"



* 노루발풀 (Winter Green)의 꽃말은 '은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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