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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풍선 Oct 15. 2024

대학생활 및 첫 직장생활

10화_정상인으로 돌아왔다는 희망

한국에서 아주 바쁜 3개월을 보내고,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내 몸은 그다지 회복되지 못했다. 


하지만 학업에 대한 큰 목표가 있었던 나는 기숙사에서 아침 6시에 일어나서 교과서를 예습하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도서관문이 닫을 때까지 공부하고, 다시 기숙사에서 잠만 자는 생활을 반복했다. 


주말에도 쉴 시간은 없었다. 토요일에는 교회에서 진행하는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일요일 오전에는 복단대학교 오케스트라 연습, 오후에는 교회 예배를 드리러 가야 했기 때문에 나는 실질적으로 쉰 적이 없다. 


잠들기 전까지 어깨 통증이 극심하고, 외로움으로 혼자 덜덜 떨다가 잠들었다. 공부하느라 앉아있는 것도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나는 그렇다고 쉬고 있는 나를 견딜 수는 없었다. 쉬는 게 두려웠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이 무서웠다. 


나는 학교 주변에 어떤 맛있는 음식점이 있는지도 몰랐고, 학교 밖으로 나갈 시간도 별로 없이 생활했다. 그래도 이것이 진정한 대학생의 생활이고, 그 고생을 하고 어렵게 대학에 왔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학생으로서 넘기 힘들다는 GPA 3.0 이 넘게 성적이 나왔다. 


난 이대로만 가면 내 인생을 계획대로 되겠다며, 아프고 힘든 일들이 있지만, 계속 버티면 이렇게 다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1년 뒤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겨울 방학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간 뒤 코로나가 유행하여 나는 중국에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한 학기를 온라인 수업으로 들은 뒤, 수업 집중도가 너무 떨어진다고 판단해 휴학을 하고, 인턴을 시작했다. 


나는 집과 차로 2시간이 걸리는 회사에 인턴으로 취직해 혼자 자취를 하며 살았다. 법학과 교수님을 보좌하는 업무였는데, 하는 업무는 다양했다. 


서양법철학은 기독교와 연관이 깊다. 그래서 내 업무는 종교 교육자료를 만드는 업무였고,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완전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헌신적으로 일을 했다.


회사에서 밤을 세기도 하고, 밤에도 일을 가져와서 했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재단을 운영하며, 종교인들을 돕고 있었는데, 그런 회의에도 모두 참석했었다. 


그리고 부족한 중국어 실력도 보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회사가 끝나고는 책을 읽었다. 하지만 너무 아플 때는 누워서 웹툰을 봤고, 나는 공부를 안 하는 내 모습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편히 쉬지 못했다. 당연히 고통스럽고 어깨의 통증은 계속되었다. 


나의 가장 친한 고등학교 친구는 너는 좀 쉬어야 한다고 문제를 파악하고 충고했지만, 나는 너무 행복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아픈 몸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였다. 성경 속 아픈 인물들을 생각하며, 신이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런 만성적인 어깨 통증과 기흉이라는 병을 주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항상 뭘 하든 평균 이상 했기 때문에 성격이 오만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나는 이 병이 신이 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했기에 고통은 그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서 교육과정도 추가로 듣고, 종교 공부를 열심히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나는 몸속에 공기가 찬 느낌을 다시 받게 되었고, 불안감 속에 내 발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응급실에 갔다. 나는 이미 1년 전에 재발률을 10% 이하로 낮추는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X-ray 검사 결과 2021년 3월 기흉이 재발했다는 판정을 받았다. 


나는 신이 나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신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있는 나를 또 병에 걸리는 걸 허락하다니. 내가 또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 왜 신은 나를 보호하지 않고 계속 버리는 걸까. 내 몸이 아픈 것보다도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에는 신한테도, 엄마한테도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서러웠다. 


고통은 고난에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더한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인 평가는 나를 더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의 삶을 신과 분리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기흉의 재발은 생각의 방향성이 완전히 바뀌는 전환점이었다. 내 정체성과 밀접하게 붙어 있는 종교와 부모의 영향을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나는 서울로 차를 태워주겠다는 회사 동료의 호의를 거절하고, 완전히 낙담한 상태로 병원에서 준 X-ray CD를 들고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공주에서 서울까지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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