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인은 누구나 겪는다는 월요병. 그것은 내게도 예외 없이 찾아왔다.
병의 시작은 사소한 것이었다. '아아를 밤에 마실 수 없다'는 아주 작은 자기통제가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18시 이후 마시는 카페인은 다음날 출근에 지장을 주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통제는 육체적 피로는 줄일지언정 불만은 더욱 키워갔고, 그것은 결국 내일에 대한 거부감으로 똘똘 뭉친 지독한 고질병을 불러오고 만 것이다. 내게 월요병이란 자유의 통제에서 오는 결핍의 결과였다.
월요일의 거리는 그 어느 요일보다 칙칙하다. 나 또한 주말의 설레고 왁자지껄한, 술냄새가 섞인 그 거리를 황망히 걷는 것이 싫었다. 시끄러운 거리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술을 좋아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전날 밤의 온기가 사라진 거리는 마치 유령도시 같았다. 그리고 그 유령도시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모두 넋을 빼놓은 것 같으니, 그들의 존재는 있어도 없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그리고 나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월요병에 걸린 사람들의 도착지가 병의 근원지라는 현실은 사회의 소속을 갈망하는 자들이 지불해야 하는 소속의 대가이자 무게였다.
그래도 끔찍한 월요일이 지나가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던 몸뚱이도 그런대로 남은 날을 버텨낸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면 다시 휴일이 오고, 월요병이 시동을 거는 것이다. 이런 패턴이 지속되다 보니, 나는 내 속의 무언가가 툭 떨어져 나간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그건 내 자존감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하루의 기쁨이 주말 디데이를 세는 것으로 바뀌었을까. '꿋꿋함'이 점점 '꾸역꾸역'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가 너무나 보잘것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아 몸서리가 쳐졌다.
내 마음이 이런 사념을 담기 버거워질수록, 나는 주말이 주는 '내 시간'에 집착하게 되었다. 주말 중 하루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홀로 있어야 비로소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알람이 넘볼 수 없는 방 안에서 홀로 뒹굴다, 책과 노트북을 들고 근처 카페에 가는 것.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이 내가 원하는 식사를 내가 원하는 시간에 하고, 밤에 마시는 아아를 즐길 때야 숨통이 트였다. 소속을 벗어난 자유, 그것은 소속에게 빌린 자유였다.
자유의 당도는 소속의 부담감 속에서 더 높아졌다. 어쩌면 자유는 소속(혹은 구속)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일게다. 그러니 누군가 자유를 위해 소속되지 않는 삶을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주저할 것 같다. 무소속의 자유는 불안감이라는 조건에 의해 되려 구속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은 그녀의 마음은 마치 골이 난 아이 같다. 아니, 지금의 그녀는 좋고 싫음이 뚜렷해 명쾌하기까지 한 아이만큼도 못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