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은 벤츠를 타고

by 유지영


예비 1차 발표를 기다리던 7월 23일,

매일같이 들락거리던 카페에 새로운 글이 올라왔다.



“저 드디어 연락 왔네요~! 그런데 저는 이번에 이사를 포기하려 합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SH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8월에 예정되어 있던 예비 1차 발표가 7월에 갑자기 올라온 것이었다.

카페에 올라온 글의 내용은 ‘집은 좋았지만 현재 집보다 비싸서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빨리 발표가 나다니, 주여 감사합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는 곧장 SH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마곡지구 59 예비 28번까지 공급


28번..!



지난 차수의 예비 1차 공급은 12번까지였는데, 그중 실제 계약자는 단 한 명이었다.

됐다, 됐어! 드디어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곧바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비 28번까지 돌았대!!! 우리 2차(9월)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지난번엔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많진 않겠지???”


카페 글을 뒤져보니, 계약 의사가 있다고 밝힌 사람은 세 명 정도였다. 우리는 예비 50번이었으니, 28명 중 여섯 명만 계약한다면 정말로 2차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예비 1차 당첨자들의 계약 일정은 8월 11일부터 13일까지였다.



이후 나는 가만히 기다리기를 못하는 사람처럼

매일같이 카페와 SH 홈페이지를 들락거렸다.


계약 기간이 끝나곤 SH에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 처음 연결된 남자 직원은 “곧 계약 현황이 올라올 것”이라고 했고 두 번째로 연결된 여자 직원은 “계약 현황을 올릴지 말지는 부서의 재량이라 확답드리기 어렵다”고 했다.


그때 카페의 한 회원이 답답해하는 나에게 댓글을 달아주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홈페이지 링크 공유드려요, 여기 보시면 아마 계약자 몇 명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곧장 홈페이지에 접속해 떨리는 마음으로 1단지부터 차례로 클릭했다.


1단지 0명

2단지 0명

.

.

6단지 1명

.

.

10단지 2명

11단지 1명

12단지 1명



계약자는 다섯 명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신축이라 따로 접수해야 하는 9단지를 제외하면 총 14단지가 있어야 하는데 목록에는 1~12단지만 있었다.

조금 지도를 내려보니 아래쪽에 14, 15단지가 새로 나타났다.


14단지...... 1명

15단지... 4명



8월 계약자는 총 10명이었다.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 처음부터 다시 세고 다시 세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몇 번을 확인해도 계약자는 열 명이었다. 그 말인즉 9월 발표(2차) 때는 46번에서 끊긴다는 뜻이었다.


마지막으로 SH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하도 자주 전화를 해서인지, 이제 콜센터 직원분은 내 목소리를 알아보는 듯했다.


“9월 2차 발표 전에 예비 당첨자에게 미리 연락을 주시나요? 계약 의사가 없는 사람을 취합해서 다시 선정하는 일은 없는 거죠? 제가 50번인데, 이번에 열 명이 계약했다고 하면 저는 11월까지 무조건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아 저희가 미리 전화를 하는 건 없고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처음엔 예비라도 들었으면 했던 마음이

막상 예비를 받으니 어느새 ‘올해 안에는’,

또 ‘이왕이면 좀 더 빨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시기 나는 여름 내내 집에서 에어컨 바람만 쐬고 있었던 탓인지 감기에 걸렸다. 해가 너무 뜨거워 아이를 데리고 어딜 나가지도 못했다. 콧물을 훌쩍이며 하루 종일 찡찡대는 아이를 돌보느라 제대로 밥을 차릴 힘도 없었다.


제발 누군가 와서 이 어지러운 집을 정리해 주길, 단 몇 시간이라도 푹 잠에 들게 해줬으면 했지만 감기에 걸린 신분으로 누굴 부르지도 못했다.


냉장고에는 엄마가 생일이라고 챙겨 준 제육볶음이 있었지만 침대에 한 번 누우니 다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내가 가서 볶을게!'라는 남편의 말에 빨리 그가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10시 반이면 도착해야 할 남편이 그날따라 처리할 업무가 많아 10시 반에 퇴근했고, 갑자기 아버님에게 전화가 왔다며 시댁에 잠깐 들렀다 오겠다는 것이다. 내 생일을 맞아 아버님이 떡을 해오셨는데, 하루라도 빨리 가져가라는 아버님의 말씀에 남편은 결국 시댁으로 향했다.


시간은 어느새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약기운에 피곤한 것이 더 컸다. 결국 “나 그냥 밥 안 먹을래. 자기 혼자 알아서 밥 먹고 와.”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쫄쫄 굶어 배가 고팠던 나는 냉장고 안에서
‘절대 냉장실에 넣지 마세요. 받자마자 무조건 냉동실에 넣으세요’라는 문구가 붙은 떡들을 발견하게 된다.



“떡을 냉장고에 넣으면 어떻게 해! 냉동실에 넣었어야지!”

“급하게 넣어서 그래. 버리면 되잖아.”

“아니… 이걸 이렇게 다 버릴 거였으면!!!”

“이미 넣은 걸 어떡하라고! 버리면 되잖아!!!”

“아니!!!!”


어제 나의 제육볶음과 맞바꾼 이 떡이, 허무하게 한 입도 못 먹고 버려지다니… 우리는 둘 다 공복인 상태로, 아기에게는 한우가 들어간 이유식을 먹이며 한참을 싸웠다.



오늘도 사이좋게 둘이서 제육볶음을 먹기는 어려워 보였다. 고기가 상하기 전에 냉동을 해야 했다.


터질 듯한 한 칸짜리 냉장실에서 제육볶음을 꺼냈지만, 냉동실은 이미 이유식 재료로 가득 차 있었다.

냉동칸은 냉장실보다 더 작았다.

제육볶음 통은 넣어도 넣어도 계속 미끄러지며 흘러내렸다.



제육볶음을 쑤셔박으며 나는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악!!!!!!!!!!! 이게 모두 다 이 빌어먹을!!!!!!!!! 작은 냉장고 때문이야!”






그때부터 나는 현재를 살지 못했다. 내 마음은 11월 어딘가로 향해 있었다. 모든 싸움의 결론은 다 집 때문이었다. 빨래에서 쉰내가 나면 건조기가 없는 탓, 아기가 자주 깨면 아기방이 없는 탓, 반찬들이 얼어있으면 제대로 된 냉장고가 없는 탓


와장창!


때마침 수건걸이가 떨어졌다. 이 집의 하자인지 원래 의도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처음 입주했을 때부터 욕실에는 수건걸이가 없었다. 우리는 다이소에서 5,000원짜리 수건걸이를 사다 붙였었는데 3년쯤 지나니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한쪽이 스멀스멀 들리더니 결국 나머지 한쪽도 버티지 못하고 툭 하고 떨어져 버렸다. 우리는 욕실에서 전쟁 나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것이 수건걸이 때문임을 단박에 알았다.


"드디어 떨어졌네..."


이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수건걸이를 또 구매해야 한다니.. 임시방편으로 집에 굴러다니던 압축봉을 벽과 휴지걸이 사이에 끼어 수건을 걸었다. 그런데 수건이 변기 바로 옆에 놓이게 되어 위생상 좋지 않아 떼어버렸다. 다음으론 집에 굴러다니던 고리 뒤편을 살짝 녹여 부착한 뒤 옷걸이에 수건을 걸어두었다. 결국 그것마저 떨어져 더 튼튼한 수건걸이를 구매했다. 고작 5,000원짜리 수건걸이를 왜 그렇게 다시 사기가 싫었는지!


하필 2구짜리 하이라이트도 넓은 위칸이 픽ㅡ 하고 끊기더니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AS 기사님은 세탁기 위에 하이라이트가 설치되어 있다면 이런 고장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했다. 다만 수리비가 새 제품을 사는 것과 거의 비슷해, 수리를 권하기도 애매하다고 했다. 어차피 우리에겐 버너가 하나 있었으니, 한 구로만 버티기로 했다. (SH에 문의하니 우리가 고치지 않고 나가도 괜찮다고 했다)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내 일상은 늘 그런 식으로 반만 고쳐 쓰고 반은 포기하며 흘러갔다.


가장 힘들었던 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사만 가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 같았다. 폰만 들여다보던 내게 남편이 말했다.


“지영아... 우선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집을 둘러보니 정말 난장판이었다.

멀티탭 선들이 얽히고설켜 바닥을 가득 채웠다. 식탁 위 엔 오만가지 물건들이 쌓이고 있었다.
아기는 선풍기 선 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마침 생일날 친정에 갔었을 때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기가 선풍기 만지는 걸 보고, 너희 아빠가 선풍기 선을 소파 밑으로 싹 정리해서 옮겨놨더라고~ 너희 아빠, 정말 최고 아니니~???


나도 아빠처럼 멀티탭의 위치를 바꿔도 보고 해결이 안 될 때는 아예 제품들의 위치를 옮겼다. 그러자 어수선했던 선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바닥이 환해졌다. 아기와 우리 가족 모두 그 멀티탭 선을 꾸역꾸역 밟고 다녔는데, 왜 진작 치우지 못했을까 싶었다. 정리만 잘하면 된다던 외숙모가 말이 다시 생각났다.


그때 내겐 넓은 집으로 이사 갈 때 쓰려고 아껴둔 서울시 가사도우미 지원금 70만 포인트가 남아 있었다.

마침 바우처의 소비 기한이 11월 30일이었고, 지금 당장 이 집에서 써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우리 집은 투룸으로 측정되어 25평보다 금액도 5,000원 더 저렴했다. 그날 바로 깔끔하게 정리를 잘해준다는 업체를 찾아 연락했다. 4시간에 7만 원, 격주로 10번 서비스를 받는 조건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덕분에 70만 포인트를 깔끔하게 모두 사용할 수 있었다.



관리사 선생님이 오시기 전날,

업체에서 메모를 통해 “관리사 선생님이 정리했으면 하는 우선순위를 적어 달라”라고 하셨다.

나는 장미꽃이 그려진 예쁜 편지지를 찾아 펜을 들었다.




관리사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희 집에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

1. 화장실 청소를 부탁드립니다 (샤워부스 물때를 닦아주셨으면 좋겠어요) 2. 싱크대 하부장 식기 정리를 부탁드립니다 3. 전자레인지 내부와 밥솥을 한 번 닦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시간이 되신다면 창틀도 한 번만 닦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기를 키우느라 집이 엉망인데, 정말 잘 부탁드립니다 ㅠㅠ❤️



정부의 가사도우미 지원 서비스가 최악이었다는 맘카페 글 몇 개가 걸리긴 했지만, 어찌 됐든 지금 어지러운 우리 집보다는 조금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관리사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관리사님 번호로 대뜸 전화가 왔다.


"여기 한강아파트 맞아요?"

"네? 한강.. 아파트요?"

"네 여기 지금 앞에 와있는데요"

"한강.. 아파트.. 는 저희 집 주변에 없는데, 저희 화곡역 근처인데요!!"

"아 주소가 잘못됐다보다 잠시만여"



내비게이션의 어느 주소가 잘못됐는지 모르겠지만,

10분 정도 더 기다린 뒤 장미 편지지를 살포시 놓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기를 카시트에 앉히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남색의 벤츠 차량이 등장했다. 주차를 대각선으로 삐뚤게 대시더니 텀블러 하나를 든 엄마 또래의 아주머니가 내렸다.

경비아저씨는 먼저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우리에게 왔다.


"아 댁에 방문하는 거라는데요??!"


아!



우리는 아주머니의 벤츠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머~ 애기가 너무 귀엽다~ 몇 갤이에요?*^^*"

"10개월이에요, 선생님 저희 집이 지금 좀 어지러운 상태인데.. 잘 부탁드려요!"

"걱정마세여~ 그러라고 저희 같은 사람들이 있는 거잖아요~*^^*"


관리사 선생님은 아기에게 빠빠이를 날리고 쿨하게 올라갔다.






마침 이유식 5+5 행사가 있다는 소식에 우리는 목동 H백화점으로 향했다. 때마침 가전 매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자동문 열림이 있는 S사의 모델을 구매할 것인지 미니워시타워가 있는 L사의 모델을 구매할 것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로 여러 개의 그릇매장도 구경하고 소파도 몇 번 앉아보면서 언젠가는 언젠가는 외치고 있었을 그쯤


시간은 벌써 한시 반에서 네시쯤이 되었고 관리사님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오늘다못한부분은담주에하겠습니다 슈퍼에서뚤어펑사서세면대는뚤어보세요


내가 적어둔 일들은 그래도 4시간이면 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찰나, H 백화점은 주차비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우리는 팝업 부스에서 이유식 10개를 쟁이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처음에 집을 잘못 찾아오신 것, 주차도 삐뚤게 대신 것, 또 관리사님에게 온 문자 때문에 나는 정말 별 기대 없이 어느 정도 청소만 되어 있었어도 상관없겠다란 생각을 가지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일인가

관리사님이 4가지를 다 못한 이유가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 곳곳이 빛나고 있었다.


그동안 흐린 눈 했던 부엌의 기름때가 깨끗하게 닦여 있었고, 물건들이 쌓여 있던 아일랜드 식탁도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잡다한 물건들은 한 곳에 싹 정리되어 있었다.


원래는 외출 후 집에 돌아올 때면, 다급하게 나갔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매번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내가 남겨두었던 메모에는 1번부터 3번까지만 동그라미가 쳐져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부족한 것은 담주에 말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격주로 신청한 터라 다음 주가 아닌 다다음주로 정정해드려야 했지만, 선생님이 단 하루 왔다간 것만으로도

집안 곳곳의 묵은 때들이 다 사라져 있었다.


미래에 방 한 칸 늘리는 것만 생각하며 그간 지금 있는 방 한 칸을 너무도 어지럽히고 있었다.

지금을 살아내 보자는 남편의 말은 유효했다.



그렇게 나의 요정은 벤츠를 타고 등장해

집안 곳곳을 새롭게 창조해 주었다.


그 사이 뜨겁게 불던 바람은 어느새 선선해지고

시간은 9월을 향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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