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또 다른 시작

브런치북 프로젝트를 마치며

by 유지영


출산 이후 세 번째 집 발표를 기다리며, 나는 원인 모를 피부 가려움증에 시달렸다. 밤이 되면 온몸이 간질거려 잠들 수도 없었다. 참다못해 피부과로 달려가 하도 긁어 멍든 곳곳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의사 선생님과의 스무고개가 시작됐다.


“최근에 한약 먹은 거 있어요?”

“아니요”

“새로 시도해 본 거나 환경이 바뀐 건요?”

“아기 때문에 최근에 에어컨을 켜긴 했어요. 혹시 이거 때문일까요?”

“아기요? 결혼했어요?”

“네, 얼마 전 자연 단유도 했는데 이것 때문일까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네요”

“아니면 스트레스 때문일까요? 요즘 잠을 잘 못 자서요”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원인을 찾을 수 없을 때 마지막으로 쓰는 말이 ‘스트레스 때문’이에요. 사실 본인이 더 잘 알 거예요. 원인을 스스로 찾아보세요.”


그렇게 또 하나의 숙제가 생겼다. 3일 치 약을 먹고 나니 극심한 가려움은 사라졌지만, 잔잔한 가려움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무렵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어 영상을 하나 기획했다.

제목은 <서울 단칸방에서 아기 키우는 MZ엄마 생존기>


시놉시스는 순식간에 완성됐다. 그런데 좁은 집에서 사는 걸 걱정하던 가족들이 이 영상을 보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조회수라도 잘 나와 속이 시원해질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시놉시스를 보여줬다.


“다음 집이 확정된 뒤에 ‘사실은 이랬습니다’ 하고 보여주는 게 낫지 않을까? 지금 올리면 보는 사람도 답답할 것 같아.”


맞는 말이었다. 게다가 남편 회사 사람들과 학생들, 가족 모두 내 채널을 보고 있었다. 영상을 올리면 남편 입장도 난처해질 것 같았다. 답답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어떻게든 풀어야 했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브런치 관련 책을 발견했다. 결혼을 준비하던 시절, 세 번이나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다가 모두 떨어져 포기했었다. 그런데 책을 읽던 중 ‘이거다!’ 싶은 느낌이 왔다. 블로그도, 영상도 아닌, 바로 ‘글’이어야 했다. 마침 브런치북 프로젝트가 곧 시작된다는 공지도 올라왔다.


나는 다시 남편에게 말했다.

“브런치 작가에 다시 신청해보려고 해. 이번에도 떨어지면 아무 콘텐츠도 안 만들 거고, 붙으면 진짜 죽을힘을 다해 써볼 거야.”


3년 전과 달리 목차가 순식간에 써졌다. 첫 번째 글을 뚝딱 만들어 지원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며칠 후, 4년 전 그토록 바라던 합격 메일이 도착했다.


세 번째 집 결과를 모른 채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눌러왔던 이야기들을 쏟아내느라 육퇴 후 컴퓨터 앞에 앉으면 어느새 새벽 네 시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다음 날 오전은 초주검이었지만, 남편이 오전엔 아기를 봐줘 그나마 살 수 있었다. 잠들기 전에도 글감이 떠올라 침대를 박차고 나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육아 중에도 문득 글감이 생각나면 메모장을 켜 음성인식으로 글을 썼다. 옆에서 아기가 ‘엄마는 도대체 뭐 하는 거지?’ 하고 신기해하던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글 한 편을 다 쓰고 나면 속이 후련했다. 사람이 가장 절박하고 간절할 때 비로소 글이 한 편씩 써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미 집에 최종 당첨된 듯 첫 번째 글을 당당히 썼지만, 사실은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었다. 집 발표가 또 미뤄진다면 엔딩도 이상해질 것이었다. 그래도 ‘한 톨의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다 정말로 당첨 문자를 받았을 때, 가장 기뻤던 건 브런치북의 마지막 엔딩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겠다는 사실이었다.


10월에는 브런치북 프로젝트 준비, 아기 돌잔치, 아버님 칠순, 아빠 생신, 새 집 이사 준비까지 한꺼번에 겹쳤다. 하루는 전국을 돌며 소파를 보고, 돌아오면 글을 쓰고, 아기가 낮잠 잘 때는 성장 동영상을 편집했다. 다시 대출을 알아보거나 가구를 고르며 머릿속 모든 뇌세포를 총동원했다.


매 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형님이 물려주신 그림책 『Thank You Prayer』 덕분이었다. 귀여운 그림체와 함께 매 장마다 짧은 감사 기도가 영어로 적혀 있었다.


"오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저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나무 위에서 새들이 노래 부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은 모든 아기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매일 밤 아기가 잠들기 전 이 책을 함께 읽었다. 피곤했던 날도 책 내용처럼 맛있는 밥을 먹었고, 날씨는 맑았으며, 가족들은 변함없이 나와 딸을 사랑해 주었다. 아기도 아픈 곳 없이 건강했다. 이 책을 펼치면 하루의 마무리는 어김없이 감사로 채워졌다.







돌잔치를 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던 길, 1층 로비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부부를 마주쳤다. 바로 경비 아저씨가 말했던 11층 사람들이었다.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우리는 아기를 안은 채로 서로 인사를 나눴다.


“저 방금 돌잔치 끝내고 오는 길이거든요!”

“우와 정말요!? 축하드려요“

“결국 여기서 1년을 버텼네요 하하.”

“아이고 고생 많으셨어요.”


그런데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1층 부부도 곧 마곡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눈이 커져서 “혹시… 장기전세?” 하고 외쳤다. 놀랍게도 그 부부는 내 뒷번호 예비자였다. 이번 2차 발표에서 나란히 최종 당첨된 것이다. 단지는 달랐지만, 그래도 서로 가까운 곳으로 가게 되어 한참 동안 대출과 이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덕분에 2년 뒤 보증금이 5% 오르면 총 보증금이 5억을 초과하므로 신생아 대출 연장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검색해 보니 ‘괜찮다’는 말도 있고 ‘조심해야 한다’는 말도 있어, 그건 일단 2년 뒤의 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행운처럼 느껴졌던 중문도 이사 준비를 하며 생각지 못한 복병으로 다가왔다. 부피가 큰 소파나 냉장고 같은 가전이 들어오려면 현관 폭이 최소 90cm는 되어야 하는데, 중문이 있으면 들어오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때로는 행운처럼 보였던 것이 뜻밖의 방해물이 되기도 하고, 아쉽게 느껴졌던 결과가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한다. 앞으로도 이사 준비를 하며 수많은 행운과 수많은 변수들이 생겼다 사라지겠지만,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손을 꼭 붙들고 나아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부동산, 부동산’을 외치는 대부동산 시대에, 부동산을 단 한 번도 가지 않고 집을 구하는 이야기를 쓰는 게 맞을까 고민도 했다. 뉴스 기사 아래 무시무시한 댓글들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내게 당장 간절했던 건 남편과 딸과 함께 ‘살기 좋은 집’을 찾는 일이었다.


브런치북의 첫 장에 적었던 이야기는 결국 모두 현실이 됐다. 어느새 극심했던 피부 가려움은 사라졌다. (물론 스트레스를 받으면 가끔 잔잔히 올라오기도 하지만) 새싹이 돋았던 화분은 이제 잎이 무성하게 자라 원래대로 돌아왔다.


물론 “그래도 이건 잘못됐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결혼 4년 차인 93년생 여자일 뿐이라고, 그 사이 네 번의 집을 구하고 아이를 낳아 키웠으면 수고한 것 아니냐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항변해 본다.



누가 또 알까.

이 이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또 다른 좋은 집을 찾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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