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하며 깨달은 것 (上)

by 유지영


나는 10년 넘게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다양한 협찬 제안을 받아왔다. 처음엔 넘치는 호기심과 물욕에 선물로 보내주겠다는 요청에 모두 응했다. 비슷비슷한 색의 아이섀도 팔레트, 틴트와 립스틱, 각종 클렌징 제품과 마스크팩까지. 새로운 제품을 써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점점 좁은 방 안은 필요 없는 물건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나는 보통 화장을 지울 때, 클렌징 워터로 가볍게 닦아낸 뒤 클렌징폼으로 2차 세안을 한다. 머리를 감을 때도 샴푸만 쓰고 트리트먼트나 린스는 따로 사용하지 않는다. 스무 살에 본격적으로 화장을 시작한 이후, 서른셋이 된 지금까지 이 루틴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한 번은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에서 새로 나온 클렌징 크림이라길래 '세안할 때 써봐야지'하며 화장실 수납함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세안을 마치고 수건을 꺼낼 때마다 아 맞다! 하고 박스 속 클렌징 크림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미 클렌징 워터와 클렌징폼으로 뽀득뽀득 세안을 끝낸 뒤라는 점이었다. 그렇게 언젠가는 써봐야지, 꼭 한번 써봐야지… 하며 그 클렌징 크림은 점점 마음속 짐처럼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망의 이사 전날, 제품들을 정리하다 아 이 제품! 하고 오늘이야말로 한 번이라도 써볼까? 하고 상자를 본 나는 기겁하고 만다.



바로 유통기한이 지나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 번도 쓰지 못한 클렌징크림은 누구에게도 주지 못한 채 그대로 버려졌다.



나는 물건에 유통기한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다. 이사를 앞두고 <언젠가 쓸지도 모르는> 클렌징 오일과 어디선가 받아온 트리트먼트·린스, 각종 화장품이 담긴 봉투가 한가득 나왔다. 이것도 그냥 버리면 안 된다고 해서 하나하나 내용물을 비우고 버리느라 꽤나 고생했다.


유통기한 지난 제품들을 버리는 ASMR을 올렸더니, 짠순이 이모에게서 부리나케 연락이 왔다.

“유통기한 지난 거 너무 아깝다! 지난 거라도 좋으니 나 좀 줘~”




… 아놔.





누군가가 사용하기 "애매해서" 주는 물건들은

대부분 나에게도 마찬가지로 "애매할"확률이 높다.


어느 날 지인이 홈쇼핑에서 속옷을 샀는데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며 “한 번도 안 입은 건데, 혹시 네가 입어볼래?” 하고 물었다. 나는 하나라도 불편한 점이 있으면 손이 잘 안 가는 사람인데, 왜 그때는 홀린 듯이 진한 버건디색의 레이스 브라들을 덥석 받아왔는지 모르겠다. 내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 브라들은 늘 옷장 한쪽에 찜찜하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정작 내가 매일 손이 가던 속옷은 아무 무늬도 없고, 봉제선도 없는 심플한 심리스 브라였는데 말이다. 역시 이사 가기 전날 했던 옷장정리에서 버건디 레이스 브래지어와 팬티 세트는 한 번도 빛을 못 본 체 가차 없이 버려졌다.


이후 나는 무료로 제공해 주겠다는 시딩 제품들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내가 진짜 쓰게 되는 제품들만 '직접 선택'해 사용하고 있다. 선물 받은 에르메스 틴트보다 내 얼굴을 환하게 밝혀주는 다이소 틴트에 더 손이갔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엄마 마음을 하나씩 이해하게 된다. 결혼 전 엄마는 각종 짐들이 쌓여있는 내 작업실 방을 보며 계속 “지영아 저거 한 번 날 잡고 싹 다 정리하자, 버리자”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당시에는 엄마가 원치 않는 짐들을 매번 마주하며 느꼈을 답답함을 전혀 몰랐다. 외출하고 들어오면 항상 깨끗한 집이 마주하고 있었으니까, 모든 건 엄마 몫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남편에게 말한다. “여보, 날 잡고 드레스룸 좀 싹 다 정리하자!”



지금도 나는 수시로 물건들을 버린다. 특히 스트레스받아 무언가 사고 싶을 때, 옷장정리를 한 번 해보면 좋다. 입지 않는 옷들을 한 트럭 버리고 나면 옷을 사야겠다는 욕구가 순간 훅 떨어진다. 입지 않는 옷들과 신발, 가방이 담긴 박스들을 대량으로 기부하고 나서 이제 구매하지 않는 제품들의 기준이 명확해졌다.


뒤에서 누군가가 꼭 올려줘야 한다거나, 밥 먹고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스판끼가 없다거나, 단추가 너무 많아 화장실 다니기에 불편하다거나, 목덜미 쪽이 까슬까슬하니 자꾸 신경 쓰인다던가. 하나라도 불편한 옷은 아무리 예쁘고 화려해도 손이 가지 않았다. 나에겐 이미 <예쁘고 편한> 옷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발도 마찬가지다. 나에게는 검은 구두가 두 켤레 있었다. 하나는 아무런 장식도 없이 심플하지만 오래 신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구두였고, 하나는 디자인은 독보적으로 예쁜데 밑창이 너무 딱딱해 한 번 신고 발 여기저기에 상처가 생긴 구두였다. 매번 검은 구두가 필요한 날에 딱딱하고 아픈 구두엔 손이 가지 않았다. 계속해서 편한 구두에만 손이 가다 보니 예쁜 구두는 단 한 번도 신겨지지 못한 채로 버려졌다.


상태가 멀쩡해 버리긴 아까운 옷이나 구두는 중고마켓에 올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나 하나라도 애매한 제품은 좀처럼 팔리지 않았다. 연락이 올까 기다려봤자 그동안 공간만 차지할 뿐이었다. 애매한 가격을 받자고 중고 거래를 이어가는 것보다, 하루빨리 버리는 게 내 정신 건강에 훨씬 나았다. 비우는 데는 가속도가 붙는다. 처음엔 "아, 이건 좀 애매한데... 버리긴 아깝고..." 싶다가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다 보면 "어차피 이건 앞으로도 절대 안 쓸 텐데" 하며 훨씬 쉽게 버릴 수 있게 된다. 가장 중요한 건 애초에 버릴 물건은 애당초 들이지 않는 것이다.


물건을 많이 버리니, 내가 어떤 물건을 자주 찾게 되는지도 명확해졌다. 나는 집순이 + 동네순이라 핫플레이스에 입고 갈 화려한 옷들보단 편하고 무난한 옷들을 자주 찾게 된다. 특히나 브라가 일체형으로 나온 노브라 원피스는 내 인생템이다. 주머니까지 알차게 있어서 저녁에 동네 산책 다니기에 정말 좋다. 일단 몸에 붙는 소재가 부드럽고 편해야 손이 잘 간다. 또 나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프리랜서라 홈웨어에 더 신경 쓴다. 가격이 좀 있더라도 부드러운 모달소재의 깔끔한 노브라 홈웨어 원피스들을 구매하니 만족도는 최상이다.


배달음식 주문하고 함께 받았지만 쓰지 않는 나무젓가락과 일회용 소스들, 해지고 보풀이 일어나 손이 잘 안 가는 옷들, 언젠가는 먹으려고 사뒀지만 먹지 않는 영양제들 등. 오늘도 쓰지 않고, 일주일 내로도 쓰지 않고, 한 달 내로도 쓰지 않은 물건이면 앞으로도 안쓸 확률이 높다. 내 경험상 빠른 시일 내에 당장 써보고 싶은 제품들은 서랍이 아니라 식탁 위나 보이는 곳에 두게 된다. 반면 '일단... 이건 여기 수납하고 보자' 하고 처음부터 서랍에 들어가는 물건이라면 앞으로도 영영 빛을 못 볼 확률이 높다. 그런 물건들은 이사 전날 발견되어 "아 이거 여기 있었구나?" 하고 곧장 쓰레기통으로 향할 것이다.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며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니 안 쓰게 되고 마음만 찜찜하게 만드는 제품들은 가차 없이 버리자. 쓰지 않은 클렌징크림과 트리트먼트, 린스만 버렸는데 생리대 5개를 더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쓰지 않는 물건들을 버리면 다음엔 반드시 그 자리를 꼭 필요로 하는 제품들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비우고 비우다 보면 좁아 보였던 방에 점점 숨 쉴 틈이 생길 것이다.


그래도, 정말 애매해서 잘 버리지 못하겠다면 내가 물건을 버릴 때 하는 시뮬레이션을 추천한다.


당신은 오늘 이사를 간다. 이삿짐 업체 직원이 와서 "고객님! 이거 어떡하실 거예요? 들고 가요? 버려요?"라고 다급하게 물어본다. 트럭은 이미 짐으로 꽉 차있다. 이사 후에 저 수많은 짐들은 내가 다시 하나하나 정리해야 한다. 새로운 집에 데려갈 정도로 소중한 물건인가? 사실 없어도 상관없는 물건인가?



내 대답은 항상 버려주세요! 였다.




꿀팁박스

앞으로도 몇 번의 이사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아이를 키울 때도 가능한 한 대여 서비스를 활용하여 집 안의 짐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특히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책과 장난감이 금세 많은 공간을 차지하기 마련이다.

나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장난감도서관’을 적극 활용했다. 매주 두 개씩 장난감을 빌려와 아이에게 새로운 장난감을 경험하게 해 주면서도, 집 안이 장난감으로 가득 차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곳에는 소위 ‘국민 장난감’이라 불리는 인기 제품들도 많고, 모든 장난감이 깨끗하게 세척되어 있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다. 연회비는 단 1만 원. 처음에 연회비만 내면 회원카드를 발급받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 강력 추천한다. 장난감도서관과 함께 운영하는 '공동육아방'도 강력 추천한다.

또 나는 동네 구립도서관을 자주 이용했다. 매주 7권씩 꾸준히 빌려 읽다 보니, 아이와 함께 벌써 1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매번 같은 장난감, 같은 책만 가지고 놀면 부모도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아이를 키울 때 꼭 모든 걸 새로 살 필요는 없다. 장난감도서관과 도서관을 통해 다양한 장난감과 책을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희망도서로 신청해 신간을 볼 수도 있다.

게다가 모든 것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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