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의 8분의 7을 놓치고 있다는 것
인스타그램에서 '요가'를 검색해 보라.
화면을 가득 채우는 건 아사나다. 핸드스탠드, 킹피전, 풀 스플릿. 아름다운 해변에서, 석양을 배경으로, 완벽한 정렬로 포즈를 잡은 사람들. 간혹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명상 사진이 끼어 있지만, 그마저도 결국은 '보이는' 이미지다.
당연하다. 미디어는 시각 중심이고, 요가에서 눈에 보이는 건 아사나뿐이니까.
당연하다. 하지만 답답하다.
요가에는 여덟 개의 지(limb, 가지)가 있다. 파탄잘리가 『요가수트라』에서 제시한 아쉬탕가(aṣṭāṅga), 8지다. 야마, 니야마, 아사나, 프라나야마, 프라티아하라, 다라나, 디야나, 사마디.
아사나는 그중 세 번째, 하나일 뿐이다.
나도 그랬다.
제주에서 명상이 잘되다가, 서울에 가면 무너졌다. 혼자 앉아 있을 때는 고요했지만, 엄마 앞에서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매트 위의 나와 매트 밖의 내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문제는 아사나를 안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아사나만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사나와 명상까지는 수련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매트 밖의 삶으로 연결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매트 위에서 아사나를 수련하는 그 순간을 떠올려보라.
전사 자세 II(Vīrabhadrāsana II)에 서 있다. 앞 무릎이 90도를 넘어가려 하고, 허벅지가 타들어간다. 여기서 무릎이 아파 멈추는 것—이것은 아힘사(비폭력)다. 몸이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것은 사티야(진실)다. 타들어가는 허벅지의 감각에 머무르는 것—이것은 타파스(고행의 열)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가라앉히는 것—프라나야마(호흡 수련)다. 옆 사람의 자세를 힐끔 보다가 다시 자기 시선으로 돌아오는 것—프라티아하라(감각 제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일어나는 가운데 자기 몸과 호흡에 완전히 몰입하는 순간—다라나(집중)와 디야나(명상)가 작동하고 있다.
하나의 아사나에 8지 전체가 담겨 있다.
당신은 이미 매트 위에서 8지를 경험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8지'라는 이름으로 인식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매트를 말고 나면, 그 경험이 삶으로 연결되지 않을 뿐이다.
전사 자세에서 무릎이 아파 멈출 줄 아는 당신이, 왜 삶에서는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가? 매트 위에서 옆 사람과 비교하지 않을 줄 아는 당신이, 왜 SNS에서는 다른 사람의 삶과 자신을 비교하는가?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매트 위에서는 하고 있다.
오늘 하루, 매트 밖에서도 한 가지만 시도해 보시라. 가장 가까운 사람 앞에서, 전사 자세에서 무릎이 아파 멈추듯, 입을 여는 순간 한 번 멈춰보시라. 그것이 매트 밖의 아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