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을 극복해내는 하루
남들에게 보이는 글을 이름을 내걸고 쓰기 시작한 지 이제 일 년이 넘어간다.
물론 그전에도 블로그를 재미나게 했었고, 직장 동료 중 몇몇은 내 블로그를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회사에 엄청나게 사교성이 좋은 과장님께서 내 자리로 총총총 달려오며 "냥코!"라고 부르기 전에는 나는 냥코가 아니었지만 그가 나를 냥코라고 부름으로써 블로거 냥코와 사회인 서민혜가 하나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블로그에 대한 흥미가 식어갈 무렵,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무엇을 쓰고 싶은 걸까.
수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쏟아내기도 했다.
글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들이 있다.
나를 너무 멋지게 포장하지 말 것. 나만 애틋하게 여기지 말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지나치게 미워하지도 말 것.
이 세 가지다.
글을 쓰다 보면,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시 내 시선만 너무 강조한 글이 아닐까.
나와 반대되는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왜 저러지?' 싶다가도,
곧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요즘은 이런 생각도 자주 한다.
아무리 대혐오의 시대라지만, 못난 내 모습을 혐오하기 시작하면 결국 무기력해진다는 것.
그리고 다시 나를 미워하게 된다는 것.
물론 매일 내 모습이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 없이 대충 사는 스스로를 인식할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쓰인다.
또 한 가지, 나만 불쌍하다는 관점도 줄여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쓰는 에세이는 어디까지나 1인칭으로 직관한 사건들을 풀어낸 글이다.
하지만 글쓴이의 강한 사상이나 세상을 향한 비난이 버무려진 글은 읽기에 부담이 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그런 글은 쓰지 않으려고 한다.
예전에 쓴 글 중에 '유리가루'라는 짧은 글이 있다.
5페이지 정도 되는 글이었는데, 쓰고 나서 조용히 저장만 해두었다.
글의 말미에는 아마도 이 글이 어디에 내걸리지는 않을 테고 전하지도 않을 글이지만 글로 쓰면 어떤 분노가 좀 가라앉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쓰여있다.
어제, H가 카톡을 보냈다.
"오늘 날씨 진짜 좋아요."
날씨 좋은 날에 나를 떠올려주다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커피 마실래?”라는 내 제안에 H는 바로 좋다고 했다.
H는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만날 때면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떠들게 된다.
늘 다짐한다. 오늘은 이야기를 잘 들어줘야지.
하지만 수다를 시작하면 어느새 내 말이 60%쯤 차지하고 있다.
어제도 그랬다.
가족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학창 시절 이야기까지.
처음 만났을 땐 H가 다니는 대학원 얘기가 주를 이뤘지만,
지금은 대화 주제가 훨씬 다양해졌다.
각자의 남동생 이야기를 하다가,
학교 다닐 때 유약했던 우리가 남동생 얘기에 공감하다가,
다시 학교에 있던 못된 애들 얘기로 흘러갔다.
“요즘은 학교폭력 이슈가 엄청 민감하잖아.”
“근데 연예인 할 거 아니면 상관없나?”
우리는 그런 얘기를 했다.
그때 문득, 내가 말했다.
“보통 사람이어도 그러면 안 될 거 같아. 나도 어떤 회사 SNS 보다가 못된 애가 보이니까. 확 인사과에 민원 넣어버려 싶은 적 있거든.”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은근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었다.
나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시험은 1차가 3월, 2차가 7월, 3차가 10월이었다.
사실상 일 년 내내 시험의 늪에 빠져 있었다.
‘이번에 안 되면, 내년엔 그만두자’고 마음을 다잡고 버텼다.
2차 시험을 보러 서울에 올라갔을 땐, 고향 친구 J의 원룸에서 머물렀다.
일주일 가까이 작고 답답한 방에 신세를 졌다.
시험이 끝나고는 새로 생겼다는 쉑쉑버거에 줄 서서 다녀왔고,
카카오 캐릭터들로 가득한 카페에도 들렀다.
습기 가득한 여름밤, 따릉이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던 기억도 남아 있다.
그때 나는 좀 울었던 것 같다.
‘이 지긋지긋한 거, 다신 안 해.’
마음속에서 그렇게 외치며, 한강 바람을 맞았다.
2차 시험 합격자 발표는 아침 9시에 난다고 했다.
8시쯤 일어나 씻고 나왔더니,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2차 시험에서 3 배수에 들었습니다. 면접을 준비하세요.’
문자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기쁘기도 했지만, 동시에 막막했다.
도대체 면접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서울의 대형 학원에서 특강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학교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
실험실 동기들도, 교수님도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과분한 축하를 받으면서 나도 조금 들떴던 것 같다.
그날, 자취방에 돌아와 있는데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카카오톡이 아니라 문자였다.
의아했다.
내용은 이랬다.
“시험 붙은 건 알겠는데, 좋아하는 거 티 내지 마. 내 앞에서는 좀 조심해 줬으면 해.”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 동기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배가 좀 아픈가 보다' 하고 넘겼다.
사실 그전부터 그는 자주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곤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마음이 불편했고, 자존감도 점점 낮아졌다.
지금도 아쉬운 일 중 하나는, 결국 졸업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것이다.
졸업앨범을 자주 보지는 않겠지만, 그마저도 포기할 만큼 마음이 지쳐 있었다.
그는 내 인간관계에까지 간섭했다.
내가 겪는 갈등에 끼어들어, 엉뚱한 조언을 하거나 상황을 더 꼬이게 만들기도 했다.
면접을 본 후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나고 나서는 그와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다.
연초 시험을 준비하던 시기였고,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의사 국가고시까지 끝났다.
비로소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시험이 모두 끝난 뒤, 나는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대학가 자취방의 보증금이면 한 달 정도는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정을 짜고, 항공편을 검색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밤, 그 애에게서 연락이 왔다.
“혹시 네가 내 전 남자친구랑 유럽 여행을 같이 가는 거 맞아?”
사실 확인을 위한 연락이라고 했지만, 나는 어이가 없었다.
사실이 아니었고, 그럴 리도 없었다.
아니라고 답했지만, 그 애는 같은 질문만 반복했다.
취조하듯 묻는 말투였고, 대화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하나 했다.
“요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
그제야 그 애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럼 그 사람이랑 잘돼 보라”는 반응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 남자친구한테 관심 없어. 같이 여행을 가든, 무릎에 앉아 비행기를 타든 상관 안 해.”
나는 그날이 지나고 저쪽에 여행 일정을 물어보고 또 팔로우업도 해줬다.
상하이까지는 같은 비행기를 타지만, 나는 그곳에서 며칠 여행을 하고,
그 친구는 곧장 유럽으로 간다고.
유럽 내 일정도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여행을 다녀온 뒤, 졸업식까지는 그 애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졸업식 날, 나는 상도 받고 사진도 찍으며 대학 생활을 마무리했다.
며칠 뒤, 다른 동기로부터 연락이 왔다.
여러 장의 캡처 이미지가 함께였다.
내용을 읽고, 말문이 막혔다.
그 애가 “학사모 사진 찍을 때 쟤는 왜 같이 있었냐”며 불쾌함을 표한 메시지부터,
그동안 나를 험담해 온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말투는 믿기 어려울 만큼 노골적이었다.
같은 단체 대화방에서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 동시에 다른 친구에게
“쟤 왜 저래?”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실시간으로 사람을 조롱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또,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자기 친구들과 나를 험담한 내용을
자랑하듯 주변에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친구라고 믿었던 만큼, 배신감은 컸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따지지 못했다.
그냥 한동안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도 결국 욱해서 물어봤다.
“왜 그랬어?”
그 애는 이렇게 되물었다.
“누가 그렇게 말했어?”
그 뒤로도, 졸업한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아는 친구에게,
“걔보다 잘 나가서 복수하겠다”라고 말했다던가, (복수 나한테 왜 해 ㅠ)
“쟤가 다른 친구랑 싸워서 우리 우정이 깨졌다”는 거짓말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H와 학교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도 이 일화를 꺼냈다.
“근데 이런 건 너무 사소해서 내가 지금 얘기 꺼내긴 좀 짜치지?”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H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언니. 은근하게 계속 괴롭힌 것도 괴롭힌 거죠.”
그 말에 조금 고맙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이 이야기를 또 하고 있네' 싶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기 연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 와르르 쏟아낸 말들이 모니터에 가득하다.
이 글을 발행할지 말지, 아직 결정을 못 내렸다.
그래도 쓰고 나니까 별거 아니니 잊어버려도 되겠다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