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민혜 Apr 17. 2024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이유



  보통 수의대생들의 학교생활은 예과 시절에는 다양하게 동아리도 해보고 놀 수 있는 만큼 놀고, 본과 일 학년, 이학년 때는 지옥 같은 시험 스케줄에 치이고, 삼사 학년 때는 조금 할랑해졌다가 국시 준비할 때 바쁜 것 같다. 적고 보니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당시에는 저게 세상의 전부였지만 지금은 현역이 아니라 전혀 생생하지 않다.




  저렇게 학교를 다니면서 취직을 어디에 할지 고민한다. 혼자든 선후배 동기와 같이든 개업을 고민하기도 했다. 보통 20대 초중반의 친구들이 개업을 바로 하기는 어렵고 (하신 분들은 리스펙트!) 선배들 있다는 곳 아니면 유명한 곳들 알음알음 알아서 기술을 배운 후에 개업을 염두에 두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임상이 아니라면 면허를 딴 이후에 수의직 공무원으로 지원하기도 하고, 연구 쪽으로 빠지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의료나 보건계통은 보이는 전형적인 직업의 이미지가 강렬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길이 있어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나는 빨리 독립을 하고 싶었다. 요즘 경제적 독립은 빨리 벌어서 회사에 종속되지 않고 빠르게 퇴사하고 자유롭게 살자 그런 뜻으로 사용되는 모양이지만, 그때 나는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경제적 독립이 우선이었다. 그런 내게 학창 시절 6년은 조금 길게 느껴졌다. 아. 뭐가 되었든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도 내심 했다. 하지만 수의사로서 일을 시작하는 것은 임상이든 공무원이든 국시를 보고 면허증이 있어야 할 수 있었다. 학생 신분으로는 도전해 볼 수 없었다. 나의 미래를 또 졸업 후로 미뤄야 하는 게 답답했다. 




  어느 날 어류 교수님의 추천으로 5급 공채 시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교수님은 수업 시간마다 열변을 토했던 것 같다. 다양한 곳으로 진출해야지 이놈의 학생들.. 잔소리를 엄청하시는 분이었다. 그때도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교수님께서 직접 사무관 한 분을 학교로 초빙했을 때 마냥 멀게만 느껴졌던 공직이 어쩌면 졸업 전에 유일하게 시도해 볼 만한 일이구나 싶었다. 한국인이고, 일정 나이 이하이고, 토익과 한국사를 미리 준비한다면 면허라던가 다른 조건은 필요 없다니! 




  그때부터 진로는 더 고민할 필요 없이 사무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후에도 다양한 실습을 해보면서 안 맞는 것들을 룰아웃해 나갔는데 끝까지 남는 게 소동물 임상과 공무원 두 가지였다. 하지만 시험을 봐야겠다 생각한 이후에도 계속 미뤘다. 본 1, 본 2는 바쁘니까 3, 4학년 때 본격적으로 시험을 준비해야겠다거나 3학년 때 본시험에는 수산직이 안 떴으니까 하는 변명들로 준비를 계속 미뤘다. 




  하필 시험준비를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학과 일정이 여유로워진 3학년때는 수산직 TO가 0명이더라. 참내. 벌써 책도 몇 권 샀는데 안되려나 싶었다. 사이버 국가고시센터라는 공무원 채용 등과 관련된 자료들이 올라오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다른 직렬들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번에 다른 직렬으로라도 볼 것인가 아닐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차 과목들의 문제들을 쭉 뽑아놓고 고민했다. 




  행정직 과목들은 살펴보니 택도 없었다. 배경지식이 하나도 없던 나는 모든 과목들을 새로 공부해야 했다. 내게는 잘 맞지 않았다. 그리고 기술직 과목들도 한 번 살펴보았는데, 내가 접근할 만한 직렬을 환경직과 수산직 두 가지로 줄였다. 그중에서도 수산직 2차 과목은 생물학과 해양학을 포함하니 좀 더 접근하기 쉬워 보였다. 그럼에도 커뮤니티가 없다 보니 공부를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에 시험이 됐다는 사람이 없으니 감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응시하고자 하는 시험이 없던 때에는 당시 제일 많이 뽑는 직렬로 시험을 봤고 1차 시험에 덜컥 붙었다. 한번 1차 시험장의 분위기를 보기 위해 응시한 시험이었는데.. 시험에 붙어버렸다! 하지만 지원한 직렬의 2차 과목은 나와 전혀 관계없는 과목이라 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2차 고사장에도 가볼까 생각했지만 뭘 그렇게 하나 싶더라. 누군가는 이 시험을 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을 텐데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거기 가는 게 맞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1차도 괜히 봤다 싶었다. 제대로 하지도 않을 거면서 누군가의 자리를 뺏은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우얫든동 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이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이유였다. 면접 때나 가끔 대학교 멘토링 같은 데서 불러서 왜 준비했냐 어떻게 준비했냐 물어보면 나름 의미를 부여해서 설명했다. 실상은.. 별게 없는 것 같다. 청운의 꿈같은 걸 꾸기에는 직업에 대해 잘 몰랐고. 멋있는 것 같고 어쨌든 시험에 응시할 조건이 되고 시험을 준비할 여유가 좀 있는 시기가 맞아떨어졌던 것 같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밥줄을 찾아버린 격. 나는 항상 그런 것 같다. 인간관계도 취미도 중요한 결정들도 열정에 막 사로잡혀서 시작하는 일은 잘 없고, 어쩌다 보니 시작해서 계속하고 싶은 어떤 것으로 남는다. 




  아. 혹시나 해서 덧붙이자면, 잠깐 쉬고 있긴 하지만 나는 내 일을 아주 좋아한다.



  


이전 08화 야 수의대 나와서 왜 사무관이 되었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