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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혜 Apr 17. 2024

야 수의대 나와서 왜 사무관이 되었냐?


야 수의대 나와서 왜 사무관이 되었냐?

수의대를 나왔어? 근데 왜 진로를 이렇게 정한 거냐는 질문은 족히 백번은 받은 것 같다. 지겹도록 받는 질문은 예의상 또는 아이스브레이킹으로 건넨 말일 수도 있지만 왠지 멋진 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질문이 나오면 상대방이 일일 면접관처럼 느껴진다. 같은 공무원이나 친구, 대학동기라면 그냥 하는 거지 뭐, 하다 보니 이렇게 돼버렸다고 얼버무리고 만다. 하지만 다른 직종에 계신 분들을 만나거나 좀 손윗사람에게는 정돈된 답을 해야 하니까.. 분위기가 좀 쑥쑥 해서 나라도 입을 털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고래 실습 얘기를 많이 써먹는다. 




  후속 질문도 있다. 어찌해 볼 만한지? 전문직으로 가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는지. 특히나 경제적으로 동물병원 개업이 훨씬 좋지 않으냐, 친구 강아지가 수술하는데 돈을 아주 많이 줬다는 질문. 이에 대한 답변은 상황에 따라 다른데, 저는 실습만 여기저기서 해봤는데 비교해 보자면 제 직장이 좋습니다. 정말 다루는 분야가 넓고 많은 사람을 만나서 시야가 넓어지는 게 재미있다는 좋은 점을 말하거나. 조금 위트를 발휘하고 싶을 때는 가슴속에는 늘 사표와 면허증을 가지고 다닙니다라거나. 




  너무 면접 답변 같지만 어쩔 수없다 같은 질문 백번 들으면 일관된 답변을 하게 된다. 거의 봇이다. 내 진심은 뭘까? 아무래도 가지 않은 길은 늘 아쉽고 멀리서 바라보게 되니까. 임상하는 동기들 보면 부럽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은 공직자로서의 일이 훨씬 재밌는 것 같다. 아 물론 유학 중인 지금은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니까 이런 천하태평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네 직장에는 수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는 다른 분들도 계시고 그들에게는 위의 대답이 통하지 않는다. 아 애초에 물어보질 않는다. 왜냐면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왜 여기까지 왔는가는 많이 흐려지기도 했고. 서로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일을 시작하고 2년 차 정도였을 것이다. 내가 담당하는 제도에 헌법소원이 들어왔다. 당시 담당하던 규제가 국민의 행복추구권과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나는 헌법재판소에 우리 의견을 보내야 했는데, 당시에는 일이 정말 너무너무 바빠서 사무실에 앉아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역 설명회를 정말 많이 다녔고 국회도 많이 갔다. 법원에 들락거리는 업무나 헌법소원 같은 것들은 신경이 많이 쓰이긴 하는데 급하게 진행되는 다른 업무들에 비해서 텀이 좀 긴 일이다. 차분히 준비하고 정확하게 의견을 서술해서 제삼자가 잘 판단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업무이다. 아침 일찍 나가서 그럼에도 수산자원을 지키기 위한 어업규제는 필요함을 주장하는 의견을 쓰고 있었다. 혼자 앉아서 차분하게 뭘 쓰는 건 오랜만이라 생각하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데, 회사 선배하나가 쓱 지나갔다.




  "이렇게 일찍 왜?"




  "아 출장 있어서.. 뭐 하나 해놓고 가야 할 게 있어서요."




  사실 전날 야근으로 할 수 있었지만 도무지 집중이 안돼서 아침으로 미룬 것이기도 하다. 왜냐면 야근한다고 남아있으면 내 입장에서는 급하지 않은 일인데 남의 입장에서는 급한 일들을 해줘야 하는 일이 많아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자리에 없으면 내일 받을 자료를 지금 달라고 한다거나. 그러면 정작 내가 남아서 하고자 하는 일은 못하고 시간만 간다. 그때는 초임이라 업무 요령이 없으니 누가 달라는 자료는 정말 급한 것인가 보다! 하고 거기에 집중을 많이 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아침이나 주말에 근무하는 게 효율이 좋다. (진짜 좋은 걸까?)




  선배는 조용히 속삭이고는 사라졌다.




  "바쁘다 바빠. 그만둘 거라면.. 일 년이라도 빨리!"   





  웃고 넘겼지만 저쪽도 바빠서 일찍 나온 것이 분명했다. 스스로에게 속삭이고 떠난 그의 뒷자리가 휑하게 느껴졌다. 




  다음 글에서는 나의 진심을 돌아봐야겠다. 쏟아지는 질문에 사회적인 답변만을 하다 보니 내가 왜 여기 있는지에 대해서 가끔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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