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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혜진 Dec 23. 2021

숲Ⅱ(完)

2021-06-18,21

“그 앨 안고 있던 내 손가락 마디마디는 점점 투명해져갔어. 온몸의 세포가 빗방울처럼 그 애 몸을 타고 바닥으로 흩어졌어.”

여자는 어둠 한 가운데를 똑바로 응시한다. 

“손가락의 핏줄이 선명하게 보이고 나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지. 놀라서 그 애에게서 떨어지려고 하는데, 살이 뜯겨지는 것처럼 아팠어. 그 애한테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갈기갈기 찢겨 죽을 것만 같았어.”

그녀의 눈은 그대로, 입가에만 비릿한 미소가 스친다.

“걸어오면서 난 나를 하나 둘 버려왔던 거야. 그 긴 길 위에. 나도 모르는 새 흘렸던 거지. 그 애는 내가 흘린 나를 전부 주워서 삼켰어. 웃기지. 난 내가 그 애를 삼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녀의 입가에 어리던 조소가 울음 같은 웃음으로 터져 나온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 줄도 모르고. 

그 앨 안았지.

그 앤 알고 있었어. 내가 손을 잡을 것도. 그 앨 안을 것도.”

웃음 사이로 눈물이 떨어진다. 그녀는 눈물만큼이나 조용해졌다.

“남은 길은 온 길만큼이나 멀었어.”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린다.

“나는 더 가벼워졌어. 내 작은 숨 하나까지 그 애 속에 갇힌 것 같았지. 이대로 남은 길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어.”


“쏟아지던 비가 잦아들더니 어느 순간 뚝 그쳤어. 빗물이 고여 질척이는 땅은 걷기가 쉽지 않았지. 걷고 있었지만 바닥을 기고 있는 것 같았어. 몸 군데군데 난 구멍에는 바람이 날아와 박혔어. 그 애는 날 한가득 움켜잡고는 내게 걸음을 맞추고 있었어. 내가 겨우 내딛는 한 걸음을 그 애는 너무 가볍게 옮기고 있었고. 난 내가 끝까지 가지 못할 걸 예감했지.”

한차례 격정이 지나가고 여자는 미동도 없이 작게 읊조린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그녀를 비추던 조명이 꺼진다.

어둠. 완전한 어둠이다.

그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만이 선명히 떠오른다.


“나는 결국 숲을 빠져 나왔어. 

나와보니 나 혼자였지.

그 애가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어. 

온몸이 엉망이었어. 더 이상 나라고 말할 수도 없었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나는 계속 걷기만 했어. 

오직 한 가지 생각 뿐이었어.

내가 손을 잡았을 때, 날 보던 그 애의 눈빛. 그게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지.

그게 날 멈출 수 없게 했어. 나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까지 걸을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난 서서히 스러졌어.

희미하게 남아있던 내가 마지막으로 사라지던 날,

나는 다시 숲에 와있었어.

그날처럼 비가 오는 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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