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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혜진 Dec 23. 2021

나의 세계

20-06-16

손에 쥐고 싶은 순간들을 떠올린다. 세계가 내 손바닥만큼만 차오른다.


오늘의 세계가 나에게 열린다. 하늘이 평소보다 밝다. 햇살이 기지개를 피고 빛을 내리쬔다. 나의 세계도 햇살을 따라 기지개를 핀다.


복슬한 강아지를 부른다. 이리 온, 아가. 내가 이 아이를 예뻐하는 만큼 아이가 내 세계에 자리한다. 곱슬곱슬한 하얀 털의 감촉과, 조그맣고 따스한 체온을 가만히 바라본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이 아이에게 집중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아쉬워진다. 그 시간만큼, 아이는 내 세계에 부재했다. 손바닥에 닿는 이 아이의 존재가 사랑스러워진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하는 것만큼 내 세계에 진하게 존재하는 것이 또 있을까?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들의 얼굴이 모두 나를 응시한다. 나는 그 자리에 충만해진다. 나의 존재의 충만함을 바라보는 그들이, 더욱 더 내 세계에서 굳건 해진다.


언젠가의 사랑을 떠올려본다.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나를 버려야했던 날들도.


사랑은 나의 존재를 보다 분명하게 해주지만, 내가 사랑에 함몰되는 그 순간 세계에서 나를 지운다. 그는 알아야 했는데, 내가 그를 보는 눈빛과 그를 생각하는 모든 순간이 나의 존재를 갉아 그의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을. 내가 그와 완전히 밀착해 빈틈이 없게 하여, 나의 세계에서 그의 존재를 무엇보다도, 나보다도 더 강렬히 존재하게 했다는 것을.


신기하게도 그는 내 세상에서 완전히 증발해버렸다. 분명 그는 내 세계 안에서 점점 더 팽창하고 팽창했다. 내 세계가 그로 빼곡히 메워져 폭발할 것만 같을 때, 나는 그를 내 세계에서 추방했다. 추방을 고하는 것만으로, 내 세계에서 그가 완전한 증발한다는 것은 편리하면서도 잔인하다.


불쑥, 기억이 그를 나의 세계로 다시 불러내곤 한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조각들을 바라본다, 계속 바라본다. 내 마음에 그것이 걸리지 않을 때까지, 무애(無㝵)할 때까지.


고개를 돌려 총총대는 강아지의 발걸음에 집중한다. 차박 차박, 내 세계의 할당량을 채우고는 미련없이 떠나버린다. 홀로 된, 아니 그런 것처럼 느끼는 나는 잠시 눈을 감아 걸음 소리를 세계에 새긴다. 아주 귀여운 모양으로.


또 한번 불쑥, 이번엔 지나간 나의 부끄러운 모습들이 균열을 일으킨다. 지나치게 나를 드러내던 모양새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밉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언제나 좋다고 믿지 않는다. 솔직함이 최고의 무기라는 말은 주먹구구식의 촌스러움으로 다가올 뿐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이를 무정하다며 힐난하면서도, 그 신비로움을 동경하는 마음이 움칠 소리를 감추지 못한다.


감추지 못한다는 말처럼 나를 잘 표현하는 말이 또 있을까.


숨기고 싶은 것들이 즐비한데도 결국 머금고 있지 못하고 줄줄 흘려버린다. 나를 풀어헤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성정이 나의 실존을 담당하고 있는 관리자처럼 느껴진다.


내 세계의 양수에 절여진 내가 철퍽, 타인의 앞에 놓여 진다. 이 과정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빈번하게, 또 그만큼 아프게 나를 자리매김한다. 나만의 세계가 아닌, 그들과의 세계에.


나의 세계는, 결국 내가 타인 앞에 전부 풀어헤쳐져 그들의 세계와 뒤섞인다. 뒤섞이고, 엉키고, 뜯어지고, 다시 나의 존재가 그 사이에 돋아나고…….


눈을 뜬다. 바닥의 감촉을 느껴본다. 손발을 휘감는 공기와, 조용히 드나드는 숨소리에 나를 모은다. 모두 끝났다고, 되뇌어 본다. 그도 갔고, 어렸던 나도 갔다는 속삭임이 나를 어루만진다.


가만히 이 순간에 동화된다. 그것들은 모두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음을. 나의 세계의 일부가 된 그들이 또다시 불청객처럼 찾아올 것임을 감지한다.


불청객. 입에 쓰리게 남는 이름이다. 이미 나의 세계에 들어온 이들을 부정한다면, 나의 세계의 일부도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슬픔이 빽빽하게 세계를 삼키고, 나를 혐오하는 마음에 내 존재가 무너지고, 그만큼의 세계도 무너져 내림을 너무도 절실히 겪어왔다.


이제는 그들을 불청객이 아닌 나의 오래된 친구처럼 여겨본다. 다음에 찾아올 때는 안녕, 또 왔구나. 인사를 건네 보자.

포근한 인사를 상상하며, 오늘의 햇살을 즐긴다. 오늘의 햇살이 나에게 열어준 세계임을 감사하며, 나의 세계를, 나의 실존을 즐긴다.


아름다움이 선명히 떠오른다.


나의 세계를 온전히 바라볼 때만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음이, 둥실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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