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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Sep 12. 2020

남편의 휴직을 대하는 아내의 태도

   처음부터 남편의 핸드폰을 훔쳐볼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은 방에 종일 틀어박혀 있다.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고 벽에 기대서 눈을 감고 앉아 있다. 나는 문 밖에서 쉽게 말을 걸지 못하고 망설였다. 남편은

무거운 것에 짓눌려서 일어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남편의 핸드폰에 후배가 보낸 문자가 있다. '선배, 이건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면 안 돼요. ' 이게 무슨 소린가. 남편은 나한테 상의도 없이 사표를 던지고 집으로 왔다는 말인가.


 엄격하게 따지고 들면 상의를 안 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남편이 힘들어할 때마다 언제나 '여보 그렇게 힘들면 회사 그만둬.' 하고 큰 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건 그냥 가정이었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둘 수도 있다고 가정은 해 봤지만 현실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남편이 늦은 밤에 소주를 사 들고 와서 상무 때문에 하루 종일 삽질을 했다고 하소연하거나 회사 분위기가 개판이라고 투덜댈 때마다 ' 당신 정말 힘들겠다. 그렇게 힘들어서 어떻게  다니니'라고 했다. 사실 속으로는 '회사가 그런 곳이지. 누군들 쉽겠어. 다들 그렇게 비슷하게 살고 있는 거야. '라는 냉소적인 대답을 하고 싶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퇴근을 하고 들어오는 남편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온다. 그런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회사생활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남자들이 있다. 눈치 빠르게 상사 비위를 맞추고 저녁 회식을 잡아서 돌아가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내키지 않는 일도 거뜬히 해 내고 가끔은 감정이 없는 동물이 된 것처럼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표정관리를 할 수 있다.  물론 남편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상무가 노트북을 집에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을 때 (상무 집은 우리 동네였다) 남편은 집까지 올라가기 싫어서 경비실에 노트북을 맡기고 온 사람이다.


 어쨌든 나는 속 시원하게 말하지도 못하고 남편이 어떤 결단을 내리는지 지켜보았다. 다행히 남편 회사에서는 사표는 반려하고 휴직을 고려해 보라고 했다. 결국 남편은 6개월 정도 휴직을 얻었다. 나는 남편과 꽤 의견이 잘 통하는 파트너였다. 가끔씩은 표정만으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미리 알 수 있다. 그런 게 꼭 편리한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이 잘 통하는 건 살아가면서 꽤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도 낙관적으로 상황을 볼 수 없었다. 휴직을 하고 나서 좋아진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힘들어도 회사는 꼬박꼬박 월급을 주고 있다. 남편이 6개월이나 휴직을 하면 그 돈은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통장에 있는 돈을 누군가가 빼앗아 가려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큰 아이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센터를 다니고 있었다. 상담 선생님은 서른 살이 되었을까 싶은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나이에 맞지 않게 침착했다. 그 날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하는 말에 집중했다. 아이 얘기를 하다가 남편의 휴직으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어머니 어딘가 힘들어 보이세요'라는 말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지금도 너무 힘든데 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이제 남편 문제까지 걱정해야 한다는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야기는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불똥이 튀었다. '등산을 갔다가 밖에서 춥고 배고파서 해장국을 먹자고 했는데 남편이 괜한 돈 쓰지 말고 집에 가서 먹자고 해서 꽁꽁 언 몸으로 공복을 참고 오느라 너무 서러웠어요.' 나는 이런 얘기를 하면서 펑펑 울었다.


 남편은 젊은 상담 선생님과 내 사이에 앉아서 난처하고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주차장까지 가는 짧은 길에도 바람이 매섭게 살을 에인다.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든 나는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한 건가. 상담실이라는 곳이 사람을 무장해제시키기는 하지만 오늘은 심하게 무장해제당했다. 나는 상담 선생님에게 내 치부를 다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얘기만 하고 남편에 대한 얘기는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남편 얘기를 하더라도 해장국 얘기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렇게 남편의 휴직은 시작되었고 남편은 내 눈치를 살피느라 특별히 좋다 싫다 말이 없었다. 며칠 뒤 남편 방을 정리하다가 메모지에 암호처럼 적혀 있는 글씨들을 발견했다. 남편은 워낙 악필이다. 한참을 들여다 보고서야 무엇을 적은 건지 알 수 있었다. 거기에는 드럼 32,000원, 캘리그라프 32,000원, 아침 수영 83,000원, 통기타반 50,00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남편은 휴직기간에 하고 싶은 것을 적어 보고 동네에 있는 문화센터 강좌 금액이 얼마인지 확인한 모양이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휴직해. 그동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말하지 못했다.


 

 하늘을 오래도록 휙휙 날아가던 새가 땅으로 내려온다. 지친 새는 물로 목을 축이고 무거워진 날개를 내려놓고 날갯죽지 속에 얼굴을 묻고 잠시 세상에 귀와 눈을 닫고 쉬어가야 한다. 남편은 그 새처럼 잠시 내려와서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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