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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아현 Aug 18. 2023

대원의 소원 1-1

2023년 아르코창작기금 선정작

   1

   처음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 음악들이 있다. 몇 번을 들어도 그렇다더라 하고 지나갈 뿐이다. 그러다 어느 날 불쑥 들린 노래가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동안 수없이 들었더라도 귀에 남아 노래를 곱씹어야 처음 듣는 것이 된다. 대원이 안예은의 노래를 처음 들은 건 몇 년 전, 아내가 죽고 다시 몸을 일으킨 날이었다.

   대원은 슬픔에도 각자의 단계와 몫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 보름 동안 가장 비통한 단계는 지나왔으니 아내를 위한 몫을 다했다고 말이다. 아팠던 아내는 언젠가부터 자주 그를 달랬다. 그래도 삶은 이어질 뿐이라고. 너무 많은 시간을 슬퍼하는 데 허비하지 말라고. 어느 한 조각에 자신은 남아 있을 테니 일상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그런데 사실 걱정은 없다고 했다. 당신은 워낙 혼자 잘 놀고, 주변에 친구도 많으니 걱정이 없다고. 오히려 혼자 남았을 때 걱정인 것은 자신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덕분에 대원은 자주 아내가 없는 아침을 상상하곤 했지만 현실이 됐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햇살은 여전히 아름답게 부서지며 창문을 두드렸고, 수십 년 동안 반복한 시간에 맞춰 눈을 떴다.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삶이 이어질 뿐인 게 아니라고. 슬퍼하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신은 이전의 아무것으로도 돌아갈 수 없고. 그러나 지구가 공전과 자전을 하는 통에 이어진다고 느끼는 시간이 계속될 뿐이라고. 그래서 규칙적인 삶이 치욕스러웠다. 차곡차곡 쌓아 온 습관이라는 것들이 너무나 무용해서 견딜 수 없었다. 죽으면 다 끝나버리는 일인데 해를 따라 반복하는 모든 일이 미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때가 되면 사라지고 돌아오는 해의 일상을 느끼고 싶지 않아 커튼을 닫았다. 딸이 나가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간신히 지금이 하루의 어디쯤인지 추측할 뿐이었다. 통 입맛이 없어 손에 대충 잡히는 것을 먹었다. 딸이 현관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비척비척 잠에서 깨 거실의 아몬드를 입 안 가득 욱여넣었다. 암막 커튼을 꼼꼼히 닫아 놓은 거실에 앉아 윗집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를 듣다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좀이 쑤시면 컴퓨터를 켜고 맞고 게임을 했다. 딸이 돌아올 시간이 되어 현관 비밀번호 소리가 들리면 냉장고에서 삼각김밥과 막걸리 한 병을 꺼내 방으로 들어갔다. 대원이 막걸리와 아몬드 말고는 먹는 것이 없자 요리를 할 줄 모르는 딸이 언젠가부터 냉장고에 삼각김밥 따위를 사다 둔 덕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마저도 습관을 만들어 가는 하나의 과정처럼 느껴져 부끄러웠다. 아침에 일어나 아몬드를 한 줌 먹는 일.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오는 일. 당연하게 삼각김밥 포장의 1번을 잡아당기고, 2번을 잡아당기고, 3번을 잡아당기고. 떨어진 김 가루들을 손끝으로 꾹꾹 눌러 쓰레기통에 털어 넣고는 모서리 한쪽을 베어 무는 일. 아내는 삶이 계속될 거라고 했다. 결국 대원은 아내의 말이 맞았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대원은 해가 뜨기도 전에 침대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커튼을 걷고 면도를 했다. 미적댄 시간 동안 수염은 성실하게 자라 볼품없이 추레했다. 아직 거실은 어두웠다. 형광등을 켜고 아내의 순서를 찬찬히 곱씹었다. 가장 먼저 청소기를 돌렸다. 간간이 딸이 청소하는 소리가 들리곤 했지만, 퇴근이 늦은 딸이 꼼꼼히 청소하기 어려웠을 테다. 그렇다. 삶은 계속되고 그 안에 개인의 의지 같은 건 아주 작은 몫이다. 그 작은 것 중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아버지의 몫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끝까지 대원에게 좋은 아내였던 것처럼. 마른걸레에 물을 묻혀 구석구석 눈 닿는 곳은 모두 닦았다. 마지막으로 시선을 돌린 것은 냉장고였다. 옛말에 집주인 속이 시끄러우면 장이 다 썩는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가장이라고 한몫 차지하고 있었으나 매일 음식을 꺼내 먹는 냉장고에 걸레 한 번 들어 본 적 없었다. 분주히 주방을 마저 닦고 나니 거실에 해가 들이치기 시작했다. 나갈 준비를 하느라 거실로 나온 딸 주영이 대원을 보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는 곧장 냉장고로 들어가는 대원의 머리를 멍하니 보던 주영은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가다 말고 물었다.

   뭐 해?

   어? 청소….

   갑자기?

   대원이 별다른 대꾸가 없자 주영은 다시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대원은 청소를 계속했고 주영은 부랴부랴 집 밖을 나섰다. 무어라도 꺼내 줄 생각이었는데 마땅치 않아 말을 붙이지 못했다. 주영이 나가고 대원은 냉장고에 유통기한이 임박한 소시지가 하나 있어 데워 먹었다. 주로 이 시간은 오롯이 대원과 아내의 시간이었다. 멀건 누룽지나 빵조각 따위를 먹으며 수다스러운 아침을 보내곤 했다. 새벽 내내 아내의 아침 동선을 따라 종종거린 대원은 고요를 견디기 힘들어 라디오를 켰다. 아내는 혼자 남은 집에서 종종 라디오를 듣는다고 했다. 사람들이 두런두런 떠드는 이야기도 나오고, 노래도 나오니 적적한 시간이 훌쩍훌쩍 간다고 말이다. 아내를 따라 대원도 라디오를 켜고 주파수를 골랐다. 때마침 라디오 DJ는 다음에 나올 노래를 소개하는 중이었다.

   4907님이 신청해 주신 안예은의 〈프로스트〉 틀어 드리면서 광고 듣고 오겠습니다. 

   이제 거실은 창문 정면을 향해 넘어온 햇살로 가득 찼다. 꾹꾹 내뱉는 가사가 유난히 대원의 귀에 맴돌았다. 대원은 거실에 가만 앉아 마른 얼굴을 훔치며 인터넷에 안예은이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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