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식구가 되었다
함께 밥을 먹을 누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늦었지만 고맙습니다.
우간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나라이다. 특히 내가 사는 지역은 더욱 생소했다.
'음발레'라고 부르는 이 지역은 수도에서 차로 7시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깡촌 시골이다. 나름 좋은 건물도 있어서 나는 이곳을 제2의 수도라고 부른다.
우간다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한국인들의 수가 타국에 비해 적은 편에 속한다.
그래서 더욱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내가 사는 지역이 그랬다.
이곳이 현실판 '응답하라'였다.
우리가 사는 주거지역에 집이 총 12 채이다. 그중 평균 6 채정도에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평균이라고 쓴 이유는 해마다 임기가 끝나고 한국으로 복귀하거나, 우간다로 새로 오는 경우가 있어서이다.
먼저 호칭은 이름 대신 몇 호로 통일된다.
참고로 나는 3호였다.
그리고 매일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이벤트가 진행된다. 누가 딱 이 시간에 하자고 정하지도 안았다.
들어오기 위해서는 입구에 있는 철창문을 열고 들어와야 한다. 문을 여는 소리는 별로 크지 않은 것 같은데 발을 내딛는 순간 한 집에서 문이 열린다.
"재덕 쌤 여기로!"
그렇다. 오늘은 저기서 모이는구나. 나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가방을 메고 들어간다.
이곳에 또 다른 신기한 점이 있다.
‘1호 집이 2호 집에 전을 가져다주면
2호 집은 3호 집에 김치를 가져다준다.
3호 집은 4호 집에 빵을 구워 가져다주고
4호 집은 7호 집에 커피를 가져다준다.
7호 집은 다시 1호 집에 고기를 구워 가져다준다.’
천국의 계단 대사 중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그렇다, 우리는 이 명대사를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먹을 것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랑을 돌리고 있었다.
이렇게 음식이 돌다 보면 문제가 하나 생기기 마련이다.
어느 날 부엌에서 그릇을 쓰려고 찾으면 내 그릇이 없고 다른 집 그릇들이 있다.
내 그릇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나는 혼자 살았기에 나를 챙겨주시는 분들이 유독 많았다. 그래서 가끔 나에게 힘든 시련을 안겨주시기도 했다.
‘3호,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파스타 먹자.’
‘3호, 오늘 저녁은 간단히 우리 집에서 미역국 먹자.’
나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행복한 고민이기도 하면서 힘든 시련이기도 했다.
이렇게 챙겨주시다 보니 가끔 우리 집에 쌀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힘이 들 땐 그저 얘기를 들어주고, 좋은 일이 있을 땐 같이 웃어주며, 아플 때는 옆에 있어주는.
나는 이분들과 함께 2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분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