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러던 어느날 Nov 21. 2021

번외) 나의 아버지_01.

아주 어릴 , 아버지는 다가갈  없는 무서운 존재였다.  한마디 걸기 무서웠고, 아버지의 말은  법이었다.  시절   버는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이끄는 가정의 모습이 보통 이와 같지 않았을까 싶다. 일요일 아침은 무조건 등산을 가는 날이었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산에 다녔다. 산에 가는 것이 너무 싫어서 제발 나를 부르지 않았으면 기도한 적도 많다. 주말 저녁은 의무적으로 외식을 하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스스로의 '본분' 다한다는  저녁이면 외식을 나가자고 했다. 기분 좋게 소란스럽거나 투닥거리는 대화는 없었다. 그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아버지의  한마디에 우리는 움직였다. 아버지의 권력은 종종 어린 아들의  눈에 폭력적인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술에 취해 어머니를 때리거나, 우리를 때리거나. 그때의 충격이 고스란히 담긴 몇몇 순간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가 10살 즈음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강인함이 갑자기 사라지는 걸 느낀 적이 있다. 그것도 어린 나에겐 엄청난 충격이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술에 취해 어머니와 싸우더라도 어머니의 목소리가 더 큰 경우가 점점 많아졌고, 어머니의 울분에 못 이겨 아버지가 집에서 쫓겨난 적도 있다. 아무 저항 못한 채 이불도 못 덮고 맨바닥에서 주무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안쓰러웠고, 정말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던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13살 때, 아버지는 갑자기 나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빠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장기 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두자고 말해."


내가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 중 유일하게 기다렸던 게 장기를 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너무 어려워 직접 말은 못 하고, 아버지가 '장기 한판 둘 테야?'하고 말씀을 해주시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아버지의 당당하고 독불장군 같던 모습도 사라졌다. 그저 아버지가 술에 취한 날이 더 많아졌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화가 더욱 없어졌을 뿐. 그때 너무 어렸던 나는 왜 그랬는지 몰랐다. 그저 갑자기 착해진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아버지가 더 이상 무섭기만 하지 않아서 좋아했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기 시작한 것은. 새 집으로 이사하여 지낸 5년여의 기억 속에 아버지가 많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부산에 사시는 고모가 운영하는 모텔의 관리업무를 해주고 계셨다.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 아버지가 집에 오거나 우리가 부산에 가거나 하는 것이 가족이 상봉하는 순간이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계셨다. 밤낮이 없이 혼자 일하는 관리업무라 항상 술에 취해 일하는 듯 보였다.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의 모습도 항상 똑같았다. 아무 대화가 없거나 부모님이 서로 싸우거나. 하지만 그때는 꽤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업이 잘못돼서 집안이 많이 어렵다는 것과 몇 년 전에는 빌라 한 건물이 우리 집이었는데, 그걸 통째로 팔고 이 집으로 이사 왔다는 것까지. 물론 어린 나에게 아무도 말해주지는 않았다. 어른들의 대화 조각을 모아 알아낸 것들이다. 하루는 집에 어떤 사람들이 찾아와서 어머니를 앞에 앉혀놓고, '이자'가 어떻고 '연체'가 어떻고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항상 나 없는 시간에 왔을 텐데, 아마 그날은 내가 우연히 집에 있는 날이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 나는 어머니에게 묻지도 않았고, 어머니도 나에게 아무 말하지 않으셨다.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의 편이 되었다. 전후 사정은 전혀 모르지만, 모든 걸 감내하는 건 어머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머니가 어느 날부터 식당에서 일을 하고 파출부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아버지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술 취한 모습뿐이었다. 교우 관계가 꽤나 괜찮았던 나는, 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어쩌다가 아버지가 술 취한 채로 집에 있는 날이면, 방문을 닫고 놀거나 바로 밖으로 나가버리곤 했다. 술을 계속 더 마시는데 나이는 점점 더 들어가, 아버지는 예전처럼 술을 마셔도 금방 회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친척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항상 술에 취해 목소리를 높이고, 과거의 영광을 못 잊은 패배자처럼 자존심을 세웠다. 그럴 때마다 수습은 늘 어머니의 몫이었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렇다고 해서 내 어린 시절이 말도 안 되게 비극적이진 않았다. 공부도 나름 잘하고, 친구 관계도 좋았다. 어머니와 지낼 때는 가족들도 나름 화목했다. 학원도 다니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다만,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통틀어 하루도 빠짐없이 경험했던 '아버지의 실패'로 인한 '가정의 불화'와 '경제적 우하향'이 내 가치관과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 뿐이다. 명절에 친척들을 만나면, 없는 사람 욕을 쉴 새 없이 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평생을 봐왔다. 그걸 보면서, '우리 가족이 없을 때도 우리 아버지를 욕하면서 무시하면 어떡하지?' 하며 늘 불안해했다. 내가 봐도 우리 아버지가 미운데, 남들 눈엔 더 꼴 보기 싫을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은, '장손'인 나에게 거는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 집안에 미래는 내 손에 달린 것처럼, 어려서부터 나는 '우리 장손', '큰 아들' 타이틀의 무게를 세뇌당했다. 아버지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는 항상 어머니와 내가 참석했다. '어, 아버지가 못 와서 네가 왔구나, 잘했다. 그래, 이제 네가 다녀야지.'와 같은 말을 들으며 내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반드시 우리 아버지를 무시하거나 우리 가족을 비난하지 못하도록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마음에 품었다. 꽤나 이름 있는 서울의 대학교에 입학하고 온 친척의 축하를 받을 때, 만족감보다는 큰 산 하나를 넘었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또한, '역시 우리 장손'과 같은 말을 들으면서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아버지는 상처만을 준 사람이었다. '실패자'의 표본이었으며, 가끔은 '아빠가 없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지', '어른들의 세상이 있을 거야'와 같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어린 나는 평생에 걸친 불안과 공포가 깊은 상처가 되었고, 어머니에 대한 동정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내 청소년기를 보낼 뿐이었다.   


정말로 어린 나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아버지의 세월과 아픔이 있을 거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만약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면, 아님 조금의 대화라도 시도하려 용기를 냈다면, 지금의 내가 느끼는 먹먹함과 죄스러움이 좀 덜하진 않았을까.  

이전 15화 14) 천천히 한 걸음씩, 그러던 어느 날을 향하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