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아버지가 나에게 속내를 내비친 건, 내가 대학생 때였다. 휴학하고 일을 하던 그 시절에, 퇴근 후 밤늦게 집에 들어온 나에게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야... 아빠가 밖에 나가서 어디 갔는지 들어오질 않아. 좀 나가서 찾아봐."
부산에서 집에 잠깐 올라온 아버지는, 역시나 술만 드셨다. 하루는 청계천에서 지인들 만나서 술이 만취해 들어오고, 또 하루는 종로에서 어떻게 타고 왔는지, 집 근처 지하철역에 술에 취해 쓰러져있는 아버지를 업어온 적도 있다. 또 어디에 쓰러져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동네 여기저기 아버지를 찾아다녔다.
생각보다 금방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저 앞에 축 처져서 힘없이 걷고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얼른 따라잡아 옆에 섰다. 놀랍게도 술에 취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나를 보며 놀란 듯 말했다.
"아 그냥 잠이 안 와서 한 바퀴 걷고 있었는데 뭘 찾아다녀, 찾아다니긴."
이번에도 어디 술 취해 누워있을까 봐 걱정돼서 돌아다녔다고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아버지는 갑자기 말씀하셨다.
"요 앞에 호프집 들어가서 맥주나 한잔 하자."
어엿한 성인이지만, 아버지와 술자리를 한다는 게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더 많은 용기를 낸 건 오히려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때의 대화 내용이 다 기억에 남진 않았지만, 아직도 잊히지 않은 한마디가 있다.
"나 때문에 네 엄마 고생하고, 너네도 힘든 거 다 아는데... 나는 진짜 죽고 싶어.."
처음으로 듣는 아버지의 속마음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어렸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빠가 진짜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안다고...?'
처음으로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건, 휴학하고 일을 시작하면서였다. 나름대로 하루하루를 재미나게 살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든 일도 생겼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6일을 12시간 넘게 일했다. 그렇게 번 돈을 어머니에게 거의 다 드리면서, 남은 돈으로는 친구들과 한 번의 술자리를 가지며 행복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게 마냥 재밌지만은 않았다. 일이 힘들 때도, 사람이 힘들 때도 나는 일을 해야만 했다. 누구도 그러라고 시킨 적 없지만, 그때 나는 월급을 받아 집에 보태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기에 버텨야 했다. 가끔은 그러다 지쳐 가만히 누워있으면 어머니가 물었다.
"아들, 무슨 고민 있니?"
나는 일이 힘들어서 좀 쉬고 싶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아무 일 없다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한숨을 쉬며 일하러 나갈 때,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 아빠도 쉽지 않았겠구나..'
모든 아들들이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도 딱 그만큼씩 아버지에 대해 이해해갔다. 군대에 다녀와서 반지하에 살며 힘들어도 내색 못하고 학업과 일을 병행할 때, 이따금씩 아버지를 떠올렸다.
'지금의 삶에 처자식이 있었다면, 내가 버틸 수 있을까?"
개인적인 고통의 시간과 인내의 세월을 버텨내며, 혹여나 걱정할 까 어머니에게 내색하지 못했을 때도, 평소 가족에게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부산 생활을 끝마치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당신의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서 소를 키우며 착실하게 살아보겠다는 '엄청난' 다짐과 포부를 앞세웠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여기저기 대출받아 축사와 소를 사서 한몇 달은 잘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 증세는 점점 심해졌고, 얼마 못가 빚만 남긴 채 축사를 팔아버렸다. 그다음 해에는 소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정육점을 차렸다. 또다시 '이번엔 제대로 해보자'라는 포부와 함께, 출처 모를 대출을 받아 가게를 차렸다. 의욕으로 가득 찬 처음 몇 달이 지나자, 여지없이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가게에서 잠만 자기 시작했다. 그런 가게에 손님이 올 리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더욱 술에 이기지 못하게 된 아버지의 건강은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알코올 클리닉에 몇 주씩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알코올 기운이 다 빠져 바보처럼 멍하니 있는 아버지를 보면, 동정과 원망, 분노, 의문 등의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처음 병원에서 검사를 받다가 갑자기 피를 토하고 중환자실로 들어가게 된 날에는, '나 이제 성공할 건데 그거 보고 가야지, 아직은 아니야.' 하며 간절하게 기도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차마 깨어나달라고 기도하지 못했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먼저, 그 수십 년의 고통을 안고도 계속 옆에 있는 어머니. 그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처음 우리에게 이혼을 얘기할 때, 나와 동생은 적극 찬성했다. 우리에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삶이 더 소중했으니까. 그럼에도 무엇이 그렇게 불쌍했는지, 끝까지 아버지 옆에서 그 고통을 감내하셨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술에 못 이겨 아버지 어렸을 적 일찍이 돌아가셨다. 술에 취해 할머니와 자식들을 매일 때리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때문에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본인이 더 잘 알 것이다. 게다가 당신의 형인 큰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게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자식을 먼저 보낸 고통을 버티다 못해 할머니까지 몇 달 전에 돌아가셨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술을 떼어내지 못한다. 병원에서는 간경변이 너무 심해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몇 번을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에 퉁퉁 부은 얼굴로 몰래 숨긴 술병을 들고나가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체념했다. '이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라고.
내가 회사에 입사하고 서른이 가까워졌을 때, 그제야 어머니는 나에게 숨기는 걸 멈추셨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삶의 고비를 맞이할 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과거에 대해 하나둘 씩 이야기해주셨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던 아버지. 어린 고모들을 좁은 집에서 뒷바라지하며 대학까지 보내준 아버지. 회사에서 인정받고 성공했던 아버지.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모든 걸 잃은 아버지. 그 과거의 영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비극을 맞이한 아버지.
내가 몰랐던 아버지의 세월. 아버지의 세월과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불쌍하고 가여웠다. 어쩜 인생이 이렇게 기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이 납득이 되는 건 절대 아니었다. 사람이 살면서 실패할 수 있다. 그게 온 가족이 한 평생을 알코올 중독 아버지 때문에 고통으로 보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스스로 술은 안 마실 수 있었고, 빚더미는 피할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아버지는 여전히 '과거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여운 실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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