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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던 어느날 Nov 21. 2021

번외) 나의 아버지_02.

처음으로 아버지가 나에게 속내를 내비친 건, 내가 대학생 때였다. 휴학하고 일을 하던 그 시절에, 퇴근 후 밤늦게 집에 들어온 나에게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야... 아빠가 밖에 나가서 어디 갔는지 들어오질 않아. 좀 나가서 찾아봐."


부산에서 집에 잠깐 올라온 아버지는, 역시나 술만 드셨다. 하루는 청계천에서 지인들 만나서 술이 만취해 들어오고, 또 하루는 종로에서 어떻게 타고 왔는지, 집 근처 지하철역에 술에 취해 쓰러져있는 아버지를 업어온 적도 있다. 또 어디에 쓰러져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동네 여기저기 아버지를 찾아다녔다.


생각보다 금방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저 앞에 축 처져서 힘없이 걷고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얼른 따라잡아 옆에 섰다. 놀랍게도 술에 취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나를 보며 놀란 듯 말했다.


"아 그냥 잠이 안 와서 한 바퀴 걷고 있었는데 뭘 찾아다녀, 찾아다니긴."


이번에도 어디 술 취해 누워있을까 봐 걱정돼서 돌아다녔다고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아버지는 갑자기 말씀하셨다.


"요 앞에 호프집 들어가서 맥주나 한잔 하자."


어엿한 성인이지만, 아버지와 술자리를 한다는 게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더 많은 용기를 낸 건 오히려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때의 대화 내용이 다 기억에 남진 않았지만, 아직도 잊히지 않은 한마디가 있다.


"나 때문에 네 엄마 고생하고, 너네도 힘든 거 다 아는데... 나는 진짜 죽고 싶어.."


처음으로 듣는 아버지의 속마음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어렸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빠가 진짜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안다고...?'

 



처음으로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건, 휴학하고 일을 시작하면서였다. 나름대로 하루하루를 재미나게 살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든 일도 생겼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6일을 12시간 넘게 일했다. 그렇게 번 돈을 어머니에게 거의 다 드리면서, 남은 돈으로는 친구들과 한 번의 술자리를 가지며 행복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게 마냥 재밌지만은 않았다. 일이 힘들 때도, 사람이 힘들 때도 나는 일을 해야만 했다. 누구도 그러라고 시킨 적 없지만, 그때 나는 월급을 받아 집에 보태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기에 버텨야 했다. 가끔은 그러다 지쳐 가만히 누워있으면 어머니가 물었다.


"아들, 무슨 고민 있니?"


나는 일이 힘들어서 좀 쉬고 싶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아무 일 없다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한숨을 쉬며 일하러 나갈 때,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 아빠도 쉽지 않았겠구나..'


모든 아들들이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도 딱 그만큼씩 아버지에 대해 이해해갔다. 군대에 다녀와서 반지하에 살며 힘들어도 내색 못하고 학업과 일을 병행할 때, 이따금씩 아버지를 떠올렸다.


'지금의 삶에 처자식이 있었다면, 내가 버틸 수 있을까?"  


개인적인 고통의 시간과 인내의 세월을 버텨내며, 혹여나 걱정할 까 어머니에게 내색하지 못했을 때도, 평소 가족에게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부산 생활을 끝마치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당신의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서 소를 키우며 착실하게 살아보겠다는 '엄청난' 다짐과 포부를 앞세웠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여기저기 대출받아 축사와 소를 사서 한몇 달은 잘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 증세는 점점 심해졌고, 얼마 못가 빚만 남긴 채 축사를 팔아버렸다. 그다음 해에는 소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정육점을 차렸다. 또다시 '이번엔 제대로 해보자'라는 포부와 함께, 출처 모를 대출을 받아 가게를 차렸다. 의욕으로 가득 찬 처음 몇 달이 지나자, 여지없이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가게에서 잠만 자기 시작했다. 그런 가게에 손님이 올 리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더욱 술에 이기지 못하게  아버지의 건강은 급속도로  좋아졌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알코올 클리닉에  주씩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알코올 기운이  빠져 바보처럼 멍하니 있는 아버지를 보면, 동정과 원망, 분노, 의문 등의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병원에서 검사를 받다가 갑자기 피를 토하고 중환자실로 들어가게  날에는, ' 이제 성공할 건데 그거 보고 가야지, 아직은 아니야.' 하며 간절하게 기도했다. 하지만  번째로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 나는 차마 깨어나달라고 기도하지 못했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먼저, 그 수십 년의 고통을 안고도 계속 옆에 있는 어머니. 그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처음 우리에게 이혼을 얘기할 때, 나와 동생은 적극 찬성했다. 우리에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삶이 더 소중했으니까. 그럼에도 무엇이 그렇게 불쌍했는지, 끝까지 아버지 옆에서 그 고통을 감내하셨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술에 못 이겨 아버지 어렸을 적 일찍이 돌아가셨다. 술에 취해 할머니와 자식들을 매일 때리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때문에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본인이 더 잘 알 것이다. 게다가 당신의 형인 큰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게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자식을 먼저 보낸 고통을 버티다 못해 할머니까지 몇 달 전에 돌아가셨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술을 떼어내지 못한다. 병원에서는 간경변이 너무 심해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몇 번을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에 퉁퉁 부은 얼굴로 몰래 숨긴 술병을 들고나가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체념했다. '이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라고.




내가 회사에 입사하고 서른이 가까워졌을 때, 그제야 어머니는 나에게 숨기는 걸 멈추셨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삶의 고비를 맞이할 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과거에 대해 하나둘 씩 이야기해주셨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던 아버지. 어린 고모들을 좁은 집에서 뒷바라지하며 대학까지 보내준 아버지. 회사에서 인정받고 성공했던 아버지.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모든 걸 잃은 아버지. 그 과거의 영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비극을 맞이한 아버지.


내가 몰랐던 아버지의 세월. 아버지의 세월과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불쌍하고 가여웠다. 어쩜 인생이 이렇게 기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이 납득이 되는 건 절대 아니었다. 사람이 살면서 실패할 수 있다. 그게 온 가족이 한 평생을 알코올 중독 아버지 때문에 고통으로 보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스스로 술은 안 마실 수 있었고, 빚더미는 피할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아버지는 여전히 '과거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여운 실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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