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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던 어느날 Nov 22. 2021

번외) 나의 아버지_03.

아버지는 점점 삶의 끈을 놓은 사람처럼 살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럴수록 더욱 회사에 나를 던졌다. 회사에서의 성공만이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삶을 만들어줄 수 있다고 점점 더 강하게 믿기 시작했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나에게도 희망이라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남은 어머니의 일생을 지켜주고 훗날엔 내 가정도 책임질 수 있는 힘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나를 끊임없이 몰아붙였다. 하지만 내 노력과 희생의 방향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평생을 쌓아온 신념을 순식간에 부정당한 나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아버지에게 간이식을 해주겠다는 마지막 큰 아들로서의 '의무'마저 해내지 못한 나는 죄책감에 더욱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 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나는, 결국 스스로를 붙잡아내지 못하고 공황과 불안의 늪으로 빠져들어갔다.   


우연의 예술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내가 빠르게 무너져갈 그때, 아버지는 다시 세상으로 올라왔다.

  



성공적으로 간 이식 수술을 마치고, 아버지는 빠르게 정상궤도로 돌아왔다. 퉁퉁 부은 얼굴도, 튀어나온 복수도 없었다. 생기가 도는 피부에 활기가 느껴지는 얼굴. 진짜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술 독에 파묻혀 지내던 그때에도 병원 가는 것과 약 챙겨 먹는 것에는 칼 같았던 우리 아버지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후의 몸 관리는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격해졌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담배도 엄청나게 피우셨었는데, 그것은 한 번에 미련 없이 끊어버리셨다. 그런 강인한 의지력을 가졌던 아버지는, 전에 없이 가벼워진 몸 상태에 새 삶을 살기 위한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내가 퇴사를 하겠다고 덥석 집으로 찾아가서 통보할 때, 건강해진 아버지는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말했다.


'그래 힘들면 쉬어. 일은 아무데서나 하면 되지. 그렇게 스트레스받아가면서 일하지 마.'


그 당시만 해도, 아버지의 그 단순한 대답이 단지 아들들에 대한 그동안의 미안함에서 나왔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종종 서울의 병원으로 검사를 받으러 오셨다. 주기적으로 몸 상태를 체크하는 검사라 병원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고, 나는 그때마다 아버지와 함께 병원에서 하루를 보냈다. 병실에 같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낯설었다. 과거 병원에서의 우리 모습은 이렇지 못했으니까. 항상 아버지는 의식이 없이 오늘이 고비일까 내일이 고비일까 하고 있었고, 나는 항상 좌절하거나 기도하거나 체념했다. 그래서 멀쩡하게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은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딘가 신이 난 듯 계속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마치 정말 어릴 적 보던 아버지를 20년 만에 다시 만난 것처럼, 내 청소년기와 20대를 함께했던 술 취한 아버지는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은 못 했지만, 잃어버린 삶의 방향과 의미에 대해 어떠한 조언이라도 필요했던 나는, 아버지에게 은근슬쩍 에둘러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삶은 어땠는지, 어머니도 모르는 상처와 아픔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것들이 아버지의 방황을 만들었던 것은 아닌지 듣고 싶었다.


아버지도 술 때문에 가족을 힘들게 한 할아버지를 미워하셨다. 그래서 시골에서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에서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때를 말할 때마다 미소를 머금었다.


'야 진짜 열심히 했다. 그 전선들 똑같이 생긴 거를 구분한다고 수백 번 들여다보고 줄줄이 다 외우고 다녔어. 손님들이 어린놈이 열심히 한다고 인정해주는 게 참 좋았다. 사장님네 집에 딸린 방 하나에서 먹고 자면서 일했어도 참 재밌었어.'


보통 미화된 과거를 이야기할 때는 기분이 벅차오르지 않던가. 그래서 신이 나 이야기하는 아버지를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내가 정말 놀랐던 건, 아버지의 인생 최대의 고비와 실패, 좌절을 이야기할 때의 아버지의 말들이었다. 업어 키운 여동생이 나중에 본인에게 상처를 주었던 이야기, 회사 다니면서 매일 같이 거래처 술상무를 해야만 했던 이야기. 그래서 가족에게 신경을 많이 못써줬던 이야기. 믿었던 동료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이야기 등 셀 수 없이 많은 고난과 아픔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긴 이야기를 다 듣자마자 나는 생각했다. '아.. 엄청 많은 일이 있었구나 아버지의 인생에도...' 그래서 나도 조금의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래서 후회는 안 해요?' 그 말에 아버지는 대답했다.


'열심히 살았다는  후회  . 나는 원래 결혼할 생각도 없었어. 서울에 혼자 올라와서 개고생 하면서도  동생들 공부는 시켜야겠어서 버텼다.  가족들은 내가 벌어먹여야 한다고 발버둥을 쳤다.'


뭐지? 싶었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혼을 해서 너희들 크는 거 못 보고 엄마한테도 잘은 못했지만, 열심히 일해서 돈 잘 벌고 잘 사는 게 내 가족을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했지. 그때는 거래처랑 술을 안 마시면 접대가 안됐어. 술을 안 먹어보려고 했는데, 내가 영업부 임원이라 큰 거래들 앞두고는 그게 안되더라.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초창기부터 키워온 회사, 더 잘 키워야 우리 가족도 더 잘 살 거라도 믿었으니까.'


놀랐다. 나랑 똑같은 가치관으로 아버지도 회사를 다녔었던 것이다. 이어서 아버지는 말했다.


'다시 돌아가도 난 똑같이 할 거야. 근데.. 후회되는 '순간'은 있지. 내가 사업을 하다가 사기당했을 때, 그때 좀 다르게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건 있네.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을 때, 고집을 안 부렸으면 좀 나았을 텐데... 하는 것도 있다. 야... 그 우울증이라는 게 충격을 한 번 받으니까, 버티질 못하겠는 거지. 그때 미쳐가지고 뭐라도 해보겠다고 자꾸 헛발질을 하니까 사람이 더 망가지는데... 진짜 매일같이 죽고 싶더라.'


소름이 돋았다. 아버지의 삶에는 내가 궁금했던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무언가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아무 말도 못 하고 듣기만 했다.


'내가 너 열심히 산거 알아. 뭐든 잘할 거고. 그래서 스트레스 받으면서까지 일할 필요 없다고 하잖아. 몸뚱이랑 정신머리만 멀쩡하면 어디서든 살 수 있어. 스트레스 받아서 마음이 곯으면... 진짜 망할 수도 있다 그거.'


내가 33년을 살면서 아버지한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위로를 하기 위한 따듯한 말이 아니라 그저 덤덤하게 건네는 말 몇 마디였다. 마음이 무너지는 것 그리고 아픈 마음을 끝까지 알아주지 않으면 겪게 될 수 있는 슬픈 비극까지 아버지는 전부 경험했다. 퇴사하겠다는 나에게 1초도 고민 없이 대답했던 그 말이, 미안함에서 나온 게 아니라 본인의 경험에서 나온 진심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아버지는, 스트레스 많이 받을 거면 그냥 그만두라고 항상 이야기한다. 가진 게 없는 삶은 다시 일으킬 수 있지만, 마음이 무너진 삶은 되돌리기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일까.


다시 밝은 에너지로 스스로를 충전해가는 아버지에게, 한 없이 무너져가던 나는 더할 나위 없는 위로를 받았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잠시 멈춰 서기로 했던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를 믿어주고 응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대한 원망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아버지의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당분간 없는 셈 치려 한다. 평생의 상처가 한 번에 없어지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아버지의 건강한 미래와 긍정적인 변화에 희망을 걸어보려 한다. 방향이 잘못되었을 뿐, 아버지 또한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니까. 고작 몇 달 전의 나로 돌아가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발버둥 치는 나보다, 훨씬 더 아버지는 당신의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테니까.


                                                                                                                      - 나의 아버지_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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