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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던 어느날 Nov 20. 2021

14) 천천히 한 걸음씩, 그러던 어느 날을 향하여.

나는 3개월의 휴직을 마무리하고 복직을 했다. 그 사이 퇴사하여 안 보이는 얼굴들도 많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회사를 떠난다. 나 역시 여전히 출근이 몸서리치게 싫고,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다. 아직도 가슴은 답답하고, 조급함과 불안함이 가끔씩 내 감정을 지배한다. 그래도 여전히 회사를 다닌다. 다만 3개월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건강하고 뚜렷한 목표와 이를 위한 나름의 체계적인 계획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를 천천히 실행해가며 느리지만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내가 몸소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여전히 지옥 같은 회사 생활을 견딜 수 있는 힘이다.


과거의 나는 회사가 전부였고 회사에 인생을 걸었다. 그래서 이곳에 하루하루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회사에서의 평판과 인정이 중요했고, 완벽한 나여야만 했다. 회사에서 무너지는 것은 내 인생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회사 일에 매몰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고, 그것을 못하는 것이 내 잘못이 아님을 매일같이 되뇐다. 조직이라는 큰 틀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그 이상의 에너지는 나를 위해 쓰자고 수십 번 나를 설득한다. 옛날 같지 않다고 욕 좀 먹으면 어떤가. 그 무엇보다 내 인생이 소중한 것을. 그렇게 아껴둔 에너지를 퇴근 후 내 삶에 쏟는다. 하루에 단 한 시간이라도 내 인생의 변화를 위한 투자를 하고, 조그마한 성과를 달성하고 변화를 체감한다. 그렇게 나의 '그러던 어느 날'을 위해 꾸역꾸역 회사를 다닌다.




휴직을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나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월급은 마약이 맞다는 것이다. 내 모든 소비 패턴이 '월급을 다 쓰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 병가는 유급이라, 기본급의 70%는 나왔다. 그러나 기존 월급을 다 써야 딱 맞는 나의 지출은, 70%의 월급으론 많이 부족했다. 등골이 서늘했다. 만약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못 이겨 퇴사를 했다면, 현실은 첫 달부터 참담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비 패턴 유지'를 위해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운동과 독서 외에 처음으로 '목표'로 세운 것은, 나의 재정 상태를 건전하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취업을 한 순간부터 신용카드가 주는 마약 같은 중독의 늪에서 살았다. 거기다가 대출받은 돈도 다 날려서 몇 천만 원의 빚이 있다. 하지만 소비를 통제하고 악순환을 끊어내지 않는 이상, 어떤 긍정적인 변화도 시작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체크카드를 새로 발급받고, 신용카드는 임직원 카드 하나 빼고 다 잘라버렸다. 임직원 카드를 사용하는 것이 더욱 경제적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루 용돈을 정했다. 일주일 단위 돈 관리를 하기엔 난 아직 유혹에 약했다. 하루의 쓸 돈을 체크카드 계좌로 옮기고, 아껴서 남으면 그 잔액 위에 다음 날의 용돈을 얹었다. 그렇게 쌓인 돈이 일주일이면 십만 원이 넘었고, 이를 그대로 다시 저축하거나 할부금을 갚았다. 어렵지 않았다. 그냥저냥 하는 일이 아니라, 에너지를 쏟아붓고 나와의 싸움을 몇 번 이겨야 하는 수고로움을 동반하니 할 만했다. 3개월이 지난 지금, 난 월급 안에서 체크카드로만 생활하고 저축도 한다. 퇴사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초석 마련에 성공했다.


운동과 독서도 꾸준히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하는 것 같다. 인생 가장 어두운 순간에 나를 구해준 것이 운동과 독서인만큼, 그 두 가지에 소홀해지는 순간 또다시 돌아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아직은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퇴근이 늦어도 헬스장은 반드시 가고, 주말이면 아침엔 반드시 운동을 한다. 회식으로 술에 취해도 책은 읽고 잔다. 주중 목표인 하루 '30분'은 내 남은 에너지를 쏟으면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1시간 이상씩은 읽는다. 누군가에게는 강박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에겐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보단 백배 천배 나은 일이다. 그 덕에 내 생에 가장 좋은 몸상태와 가장 많은 독서를 하는 시절을 보내고 있다. 퇴사를 위한 체력과 지혜를 쌓아가는 중이다.  


또한, 언젠가 준비가 되었을 때 박차고 퇴사하기 위한 도전을 많이 해보려 한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사이드 허슬'을 나도 하고 있다. 책을 읽는 것부터 관련 공부 및 교육을 받고 스스로 실행에 옮겨본다. 난생처음 홈페이지도 만들어보고, 해본 적 없는 SNS도 하고 있다. 마케팅에 대한 지식도 쌓고, 아주 작은 범위이지만 직접 실행도 해보고 있다. 사실 이건 좀 힘에 부친다. 혼자서 외롭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지속되는 실패에 '언제까지 해야 하나' 하는 막막함도 가끔은 느낀다. 하지만 여러 번의 작은 실패가 안겨준 경험들이 내 노하우가 되어가고 있음을 나는 안다. 이것도 역시 회사에서 쓰지 않고 남겨둔 에너지를 쏟아 꾸역꾸역 해나가고 있다.




 외에도 과거에는 상상도   없었던  모습으로 현재를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은 답답하고 함과 불안함이 몰려온다. 왜냐고? 여전히 회사를 다니고 있고, 당장에 화려한 성과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이걸 언제까지 하겠다는 거야?', '이런  쓸모가 있어?' 같이 회의감을 불러오는 생각들이 매번 불쑥불쑥 다가온다. 그럴 때마다 3개월 동안  많이도 변한  자신을 상기하며 어렵사리 부정의 기운을 물리친다. 비록 증상과 빈도는 현저히 낮아졌지만, 아직도 나는 불안과 공황을 달고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그래서 항상 모든 것에 최우선으로 두는 가치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이다. 당장의 성과와 변화 같은 무리한 목표는 달성도 불가능하며 조급함과 불안함만 키울 뿐이다. 조금씩 실천하고 천천히 변화한다. 비록 더디게 보여도, 3개월 동안 나에게 찾아온 변화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건 말건 상관없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나는 확신한다. 내가 느끼는 삶에서의 성장과 변화들, 이 것들이 모여 결국 언젠가 내 인생의 '그러던 어느 날'을 선물해줄 테니까.


내 인생 가장 처참하게 좌절하고 무기력했던 순간에 서서히 밝은 에너지가 드리우고 있다. 지금의 생활도 꽤나 만족한다. 여전히 아프지만, 작은 노력과 변화를 꾸준하게 체감하는 중이니까. 이런 발버둥이 밝은 미래와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여도, 이 순간의 나를 평생 칭찬하고 아껴줄 것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던가. 이제는 주변의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다. '힘든 건 내 탓이야.'라고 스스로를 상처 내던 나는 없다. 지쳐서 방전되면 멈춰서 충전해야 하는 것이다. 충전이 되어야 다시 뛰든 날든 할 수 있을 테니까. 힘든 세월을 참고 견뎌 온 나의 가족에게, 각자의 삶에 지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이제야 나는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하며, '불안해하지 말고 잠시 멈추어도 괜찮아.'라고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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