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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던 어느날 Nov 19. 2021

13)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하고 있는 나를 칭찬해.  

공황과 불안장애 증상이 한창 심했을 때,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공기업 취업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다. 5년 전 취업 공부를 하던 학원에 무작정 연락해서 상담을 잡았고, 퇴근하자마자 학원으로 향했다. 나에게 상담을 해준 취업 컨설턴트는 현재 내 상황의 좋은 점을 보길 조언했다. 코로나로 인해 어려워진 고용 시장 때문에, 취업 준비생들과 유학생들부터 직장을 잃은 사람들까지 모두 공기업 취업과 공무원 시험에 들어와서 경쟁률이 어마어마하다는 이유였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직무가 적응이 안 되고 어려워서 그러시는 거면, 업무에서 정말 작은 목표를 하나씩 세우고 성취해보세요."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지금 회사에서 뭘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닌데...'. '작은 목표 하나씩 어느 세월에?'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상담 내용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영양가 없이 상담을 마쳤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조급함에 생각했다. '결국 사업을 해야겠지?', '회사부터 옮겨야 하나?', '공부를 해야 하는데...' 건강하고 확실한 목표나 심사숙고를 거친 계획은 전혀 없고, 그냥 뭔가를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했다는 느낌을 떨쳐내기 위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기력함과 좌절감에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전부였던 나는, 어떠한 계획 수립도 실천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다그치는 단계로 넘어갔다.


'나는 오늘도 아무것도 안 했구나..., 나 같은 놈이 무슨 사업이고 성공이냐.'  

'게을러빠진 새끼... 내가 아플 자격이나 있냐.'


과거의 난 그렇게 내 맘에 스스로 상처 내는 것에 거리낌없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지금도 여전히 '이 모든 게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마음을 괴롭힌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 대한 대처가 조금 달라졌다. 그 생각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괴롭지만, 나를 끊임없이 다독이고 위로하여 괴로운 생각들을 가라앉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나는 하루에도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의식하지 못할 뿐, 그리고 그 많은 것을 해낸 자신을 칭찬하지 못할 뿐. 우린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하고 있다.


운동과 독서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후, 잠에 들기 전 항상 'To-do List'를 작성했다. 물론 지금도 하고 있다. 처음에는 다음날 해야 하는 중요한 과업만 적었다. 하지만 그때는 독서와 운동 말고는 하는 게 없어서, 많이 적어봐야 3~4개였다. 가끔 그중에서 하나라도 못하는 날이면, 또다시 '너는 달랑 그 3~4개를 못하냐...' 하는 생각에 좌절감이 들었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하는 생각으로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적었다. 목록에 있는 '할 일의 개수'라도 늘려야 내 맘이 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도무지 해야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아서, 침대에 누워 가만히 내 하루를 돌아보았다.


나는 항상 눈을 뜨면 침대 정리 먼저 한다.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항상 하고 있었던 것. 이 것을 리스트에 추가했다. '1. 침구류 정리하기'

운동을 하기 위해 아침을 꼭 챙겨 먹는다. 이전에는 안 그랬는데 휴직하고 나서부터 의식적으로 하고 있다.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이왕이면 목표로 잡아서 성취감이라도 느껴보자 했다. '2. 아침 챙겨 먹기'

밥 먹고 바로 설거지하는 습관도 있다. 너무 귀찮지만 결국 내 성미에 이기지 못해 결국 싱크대로 향한다. 이 것도 추가했다. '3. 밥 먹고 바로 설거지하기'


이렇게 했더니 내가 하루에 해야 할 일이 엄청 많아졌다. 약 챙겨 먹기, 분리수거하기, 은행 가기, 냉장고 청소하기, 마트 가기, 얼음 채워 넣기, 사이트 출석 체크하기 등등. 내가 매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거나,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하는 것들을 전부 추가하니 꽤 많아졌다. 하루의 'To -do List'에 적어놓은 해야 할 일의 목표가 10개도 넘었다. 그것들을 보면서 문득 '아, 나도 참 많은 것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동시에 '아무것도 안 하는 나'라고 스스로를 상처 내던 나 자신에게 미안해졌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은 많았지만 매일 습관처럼 하는 일이라 어렵지 않았다. 정작 그중에서 나의 의지를 불태워야 하는 것은 2~3개 정도였다. 예를 들면 '독서 1시간'이나 '긍정적인 생각 10분'과 같은 것들이 조금의 '집중'을 필요로 했다. 내 리스트는 그 '아무것도 아닌 일들' 때문에 항상 목표 달성률이 90%를 넘었고, 어쩌다 한 번 모든 일을 끝내버린 하루의 'To-do List'를 볼 때면 상당한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 또, 그렇게 하루하루 쌓인 많은 리스트를 볼 때면,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아니야'라는 생각에 큰 위로를 받을 때도 있었다.


애초에 내가 하루 살아내고 버텨냈다는 ,   하루 동안에 무엇 하나라도 해냈기 때문이다. 힘들게  많은 것을 하고 있음에도 나는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내가  하는 사소한 것들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해낸 것들이 나의 하루를 조금씩 바꿔왔다.  고마운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도대체  하는  뭐냐... 게을러가지고...' 같은 말로 스스로를 폄하했다. 다른 사람에게 같은 말을 했다면 '폭언'이고 '학대' 되었을 말을, 나에겐 어찌 그렇게 서슴없이 해댔을까. 그러니  맘이 지칠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해낼 힘이 있을  없었다.


'도전'이나 '과제'처럼 해야 하는 과업은 하루에 하나 혹은 둘이면 충분하다. 그것 말고도 우린 하루를 참 바쁘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내가 해낸 수많은 작은 일을 칭찬하기로 했다. 먼저 내 마음에 흥이 나야, 앞으로 해야 할 수많은 '도전'들도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전 13화 12) 무지를 인정하니, 그제야 책이 지혜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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