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과학, 인본주의
종교와 과학
인류가 생활하는 데 있어 질서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앞서 살펴보았다. 질서에 영향을 주는 학문으로 크게 종교와 과학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종교와 과학을 진리의 왕좌를 두고 싸우는 경쟁 관계로 바라본다. 충돌 지점이 있긴 하지만 사실 종교와 과학은 갈등 관계라기보다는 상호 보완 관계라고 바라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현대 사회를 살펴보더라도 종교와 과학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제로섬 게임을 펼치는 관계라면 16세기 과학혁명이 발발한 이후 둘 중 하나는 종적을 감췄어야 한다. 하지만 종교와 과학 모두 멀쩡하게 존재한다.
그 이유를 책에서는 종교와 과학이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종교는 질서에 관심이 있고, 과학은 힘에 관심이 있다. 종교는 과학과 달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준다. 종교는 윤리적 판단, 사실적 진술, 실질적 지침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윤리적 판단: 인간은 신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사실적 진술: 약 3000년 전 신이 우리 인간에게 동성애 행위를 삼가라고 명했다.
실질적 지침: 우리는 동성애 행위를 삼가야 한다.
종교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사실적 진술에 머무는 과학과 달리 윤리적 판단과 실질적 지침을 제시한다. 물론 사실적 진술의 진위를 가리는 데 과학이 활용된다. 과학과 종교가 부딪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사실적 진술만 잘 해결되면 종교와 과학은 제 갈 길을 간다. 과학이 발전해도 종교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대 계약
근대 시대 사람들은 태어나는 동시에 근대 계약을 맺는다. 근대 계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데 동의한다."
우리는 막강한 힘을 가졌다. 기근, 역병, 전쟁을 극복했다. 죽음을 필연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인간 내부의 기술적 결함으로 바라본다. 기술적 결함을 고칠 수만 있다면 죽음도 극복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힘이 없던 전근대 시절 사람들은 죽음에 의미를 부여했다. 천국, 영혼, 구원을 설파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으로 대중을 설득했다. 따라서 신은 필요했고, 신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사고가 널리 퍼졌다.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의료산업을 발전시켜 수명을 연장하는 데 매진한다. 의미를 부여하며 자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럴 시간에 공부나 해!"가 근대정신에 걸맞는다.
의미가 사라지자 인간은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인간은 무언가에 귀의하고 싶은 욕망을 지녔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신은 알맞은 대상이었지만 과학의 발전과 함께 설득력을 잃었다. 그 빈자리를 누군가 메꿔줘야 했다. 인본주의와 자본주의는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질서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신본주의가 막을 내리고 인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의 질서 1, 자본주의
누가 뭐라 해도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다. 물질만능주의, 빈부격차를 내세우며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자본주의만큼 인류를 화합으로 이끈 사상은 없었다. 경제 성장은 종교, 이념, 시민운동이 만나는 중요한 접점이다. 경제 성장은 애초에 '파이 나눠먹기'가 아닌 '파이 키우기'에 주력하기 때문이다. 굳이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아도 나의 배를 불릴 수 있었다. 현대 사회에서 경제 성장이 최고의 종교로 여겨지는 이유다.
경제 성장을 원동력으로 삼는 현대 사회는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원재료와 에너지는 언젠가 고갈된다. 그것이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돌파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고갈되지 않는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파도 파도 끝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식 추구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인 것이다.
현대의 질서 2, 인본주의
신본주의가 끝나고 인본주의가 등장한 배경을 살펴보았다. 인본주의는 내면을 살피고 의미를 창조하라고 말한다. 의미를 신에게 찾지 말고 스스로 찾으라는 것이다. 루소의 <에밀>은 인본주의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인본주의는 신이나 성경이 아닌 감정으로 충돌을 해결하려 한다. 좋게 느껴지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해도 된다고 인본주의는 말한다.
감정은 사적인 영역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절차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미의 기준'은 절대적인 것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변화했다. 뒤샹의 샘(변기)이라는 작품도 예술로 바라보는 것이 인본주의의 정신이다. 물건에 부여하던 절대 가치도 사라졌다. 절대 가치는 없고 고객의 자유의지만 있을 뿐이다. 고객이 선택한 제품은 가치가 있고 선택받지 못한 제품은 가치가 없다고 치부된다. 교육 방식도 변화했다. 절대 가치의 주입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변화했다. 인본주의에 따르면 신을 믿는다는 것조차 나의 결정이 원인이 된다.
개인의 경험을 최고의 선으로 내세우며 자유주의 인본주의가 등장했다. 하지만 자유주의 인본주의는 나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이 충돌할 때 위기가 발생한다. 이런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에 따라 인본주의는 다시 사회주의 인본주의와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나뉜다. 사회주의 인본주의는 타인의 감정으로 시선을 돌려 단결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우열을 나눠 우월한 민족의 경험이 열등한 민족의 경험보다 고귀하다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구체적인 측면에서 차이는 있지만 세 분파 모두 인간의 경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인본주의의 정신을 공유한다.
인본주의는 지식을 경험과 감수성의 콜라보로 바라본다. 문제는 경험이 정확히 정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험은 감각, 감정, 생각이 어우러진 주관적인 현상이다. 다른 사람에게도 경험이 나와 동일하게 작용하는지 알 방도가 없다. 그리고 나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충돌할 때 누구의 감정에 손을 들어줘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개인을 중시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라는 인본주의는 인간에게 참 듣기 좋은 소리다. 하지만 하나씩 따지고 들면 인본주의의 교리는 허점 투성이이다. 분열하려는 인간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형국이다. 인본주의가 처한 위기를 다음 장에서 샅샅이 따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