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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있는 호주 27: 여유를 배우고 한국 맛을 전하다

1년이 지나서야 여유를 배웠다.

by 찰리한 Dec 1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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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타임 포기 선언을 통해 이젠 30분 일찍 출근하는 것조차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 15시 30분이 되어 출근도장을 찍고 동료들과 또 반가운 인사를 하고 일은 빠르게 하되 마음은 여유를 갖기 시작했다.

스킨 파트가 야외라서 기후에 영향을 받는 건 사실이고 그렇기에 수당이 더 나오지만 자연을 보면서 일하는 게 얼마나 좋은지 마음의 여유를 찾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가끔 일하다 석양을 보고 잠시 넋을 놓고 있으면 귀신같이 뒤에서 현장 매니저 와인이 "pucking charlie back to work"이라고 웃으면서 내 옆에서 서서 잠시 같이 석양을 즐겼다. 불도저와 폭주 기관차 같은 사람한테도 이런 면이 있었나 하고 그렇게 5분 서 있다 보니 와인이 말했다.

"puking charlie you finished rest time"

어쩐지 왜 가만히 있었나 했다. 이 불도저 양반아! 그러면서 나도 한마디 했다.

"you, too"

어떤 날은 벼락이 내려쳤다. 비도 세차게 내렸지만 벼락이 아마도 일하는 우리 쪽 천장에 내려친 것 같았다. 순간 하얗게 변했다 3초 후에 엄청 큰 소리와 함께 기계가 잠시 멈춰서 소동이 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우린 때아닌 휴식타임을 갖게 되었고 식사시간도 아닌 이 시간에 함께 모여 서로 놀리기 바빴다. 그날만큼은 현장매니저 대런 조차도 농담을 했다. 물론 욕은 안 하지만 특유의 유머로 10대 호주 청소년들을 무참히 짓밟아주셨다.

멀리 기찻길이 보였고 엄청난 길이의 기차가 이동하는 관경을 보면서 호주는 정말 땅이 크다는 걸 또 느꼈다.


평일에는 10시 정도에 일어났다. 역시 커피와 함께 은혜 갚는다고 냥냥이가 물어 온 목 없는 생쥐들을 치우고 사료와 함께 특별히 냥이용 참치캔을 사서 사료 위에 올려줬다. 기가 막히게 참치만 싹 골라먹고는 볕 좋은 곳에 배 깔고 늘어지게 잠을 잔다.

주말에는 영어 알려주는 친절한 호주 할아버지에게 줄 커피와 미트파이를 사 갖고 갔다. 오랜만에 보는 할아버지에게 음식을 건네며 잘 부탁드린다고 하며 2시간을 즐겁게 대화했다. 물론 그 대화의 90%는 할아버지의 일방적 얘기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아주 반갑게 맞아주셨고 여전히 그들의 설교는 들리지 않았다. 하나 들린 건 다음 주에 하우스 파티를 한다고 했다.

각자 먹을 것들을 싸와서 나눠먹는다고 했고 찰리도 동참했으면 한다고 했다.

내가 또 쓸데없는 국가대표의 사명감을 갖고 한국의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 아주 당당하게 한국의 맛을 보여줄 것을 약속했다.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애들레이드 시내로 나갔다. 처음 먼저 할 일은 건강식품점에 가는 것이다. 호주 건강식품이 그렇게 좋다고 해서 한인 건강식품점에 들어갔다. 부모님과 친척분들께 한번 작정하고 보내려고 보조식품만 거의 2,000달러 넘게 구매했다. 무릎이 안 좋은 큰아버지에게 푸른 홍합을, 약간 갱년기가 온 어머니에게는 달맞이꽃을, 아버지는 로열젤리, 누나는 프로폴리스. 이름 모를 좋다는 영양제를 엄청 구매했고 한국에 택배를 보내달라고 했다. 너무 구매해서 그런지 박스가 점점 커졌고 택배비는 무료로 해주는 쎈스를 발휘해주셨다.

밖으로 나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거리를 걸어가는데 노천카페나 음식점이 참 많았다. 그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맥주 한잔, 와인 한잔에 간단한 먹을거리를 먹으며 서로 재밌게 떠들고 있었다.

나도 한번 해봤다. 선글라스에 읽지도 못하는 영어신문 들고 레드와인과 치즈, 햇살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고 두 손으로 영자신문을 들고 읽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보는 척, 그리고 와인 한 모금과 치즈 한 장.

맑은 하늘을 보면서 이곳 생활의 여유를 배우기 시작했다. 너무 좋았다. 생각을 멈추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것들을 받아들였다. 미각은 와인과 치즈에, 시각은 알아보지 못할 영어신문과 파란 하늘과 즐겁게 대화하는 사람들의 표정, 촉각은 당연히 까끌까끌한 신문 와 매끄러운 와인잔, 후각은 와인의 숙성된 포도향과 발효된 우유의 향, 청각은 무슨 말하는지 모르지만 행복하게 대화하는 다른 이들.

시드니에서는 그저 한걸음 뒤에서 그들을 지켜봤다면 애들레이드에선 나 역시 그 안에서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느꼈고 너무 행복했다.

애들레이드도 대도시답게 한인마켓도 정말 컸다. 다음 주에 교회에서 한국의 맛을 보여주기 위해 재료를 구입했다. 역시 한국 하면 소불고기 아닌가! 그리고 시드니에서 만들어 먹었던 그 찹쌀떡이 생각났다.

소는 아무리 한우가 맛있다곤 해도 호주 청정우가 내 생각에는 한수 위였다. 비행기 타고 건너온 한국에서 보다 직거래로 바로바로 소비되는 호주육은 진짜 맛있었다.

소불고기용 고기, 다행히 판매하고 있는 소불고기용 양념, 그리고 또 야채들. 찹쌀떡 재료는 역시 찹쌀가루, 팥앙금을 사 갖고 왔다.

한주가 어서 오기를 기다리며 수요일부터 소불고기용 고기에 마늘, 양파, 파, 아쉽게도 팽이버섯은 없어서 표고 비슷한 버섯과 양념을 넣고 재워뒀다.

부모님께 호주에 오는 비용과 지원받았던 돈에 10% 이자를 쳐서 6,000달러를 한국으로 송금했다. 그리고 전화드려서 돈 송금했고 곧 영양제 한 박스 크게 갈 테니까 친척들과 나눠 드시고 혹시 효력이 나거든 알려 달라고 했다. 부모님은 시드니에서 어렵게 생활했던 내 모습이 마지막이어서 어안이 벙벙하셨지만 그간의 일들을 알려드렸고 이젠 돈 걱정 안 하셔도 되고 건강하게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 영양제 필요하면 주변분들한테 주문받아서라도 알려달라고 했다.

뭔가 효도하고 있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대망의 주일. 아침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파티는 저녁 6시에 진행되기에 얼른 집으로 와서 재워 둔 소불고기 냄새를 맡아봤다. 역시 양념은 사는 게 최고였다. 찹쌀떡은 외국인에게 아마 쉽게 접하기 힘들 것 같아서 딸기를 사 왔다. 팥앙금에 딸기를 슬라이스로 썰어 넣고 찹쌀 반죽과 함께 앙금에 잘 싸서 냉장실에 보관했다.

소불고기는 역시 바로 먹어야 좋기 때문에 5시에 미리 교회에 가서 조리를 했다.

가스가 아닌 인덕션이라 불 조절 따위는 못해도 국내 대기업에서 작정하고 만든 양념이라 절대 그 맛은 실패할 리 없었다.

6시가 되자 각자 음식을 갖고 왔다. 라자냐 같은데 계란을 층층이 쌓은 음식, 토마토와 올리브를 오븐에 구워 온 샐러드 비슷한 음식, 피자와 역시 빠질 수 없는 수제 미트파이 등등.

그리고 대망의 한국 음식 소불고기를 가운데에 쫘악 놓았다. 교인들은 신기한 듯 소불고기를 보며 냄새를 맡고는 표정이 매우 밝아졌다.

목사님의 기도와 함께 앞접시와 포크를 들고 뷔페처럼 음식 앞으로 가서 하나씩 덜어먹었다. 나는 소불고기 보다 올리브와 토마토를 오븐에 구운 것들부터 먹었다. 수제 미트파이와 에그 라자냐를 차례로 먹으면서 나름의 호주 음식을 느꼈다. 그들은 역시나 소불고기를 먼저 선택하기보단 본인들의 음식에 먼저 손이 갔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소불고기를 먼저 집어 먹고는 눈이 번뜩하더니 교인들에게 이거 무조건 먹으라고 사인을 주셨다.

그리고 내 우려와 달리 소불고기는 바로 완판 되었다. 내친김에 이제 디저트라고 꺼낸 찹쌀떡을 올려놨더니 아무 의심 없이 다들 하나씩 집어먹었다. 아주 달콤한 팥앙금과 새콤한 딸기, 그리고 찐덕거리는 찹쌀에는 좀 놀랐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다.

꼭꼭 씹어먹으라고 당부하기도 전에 이미 찹쌀떡 역시 완판 되었고 그들은 한국의 맛에 푹 빠져서 어떻게 만드는 건지 레시피를 적어달라고 했다.

음.... 음... 그게 말이죠?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 양념은 아시안푸드마켓에서 사고 찹쌀가루도 사야 하고 팥앙금도 사고, 그러니까 모두 사 먹어!


거의 모든 재료는 다 사서 한 거라 실은 만들기는 좀 어렵고 애들레이드 한인마켓 가서

"How can I cook 소불고기"라고 말하면 내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게 재료를 준비해 줄 거라고 말했다. 찹쌀떡은 만약에 만약에 한국에 올 일이 있다면 그냥 마켓 아무 데나 가도 판매하니까 혹시나 한국을 온다면 꼭 먹으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또 별 하나가 참 밝게 빛났다. 이번엔도 잠시 멈춰서 그 빛나는 별을 봤다. 하지만 이젠 눈물 따위는 흐르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그래.. 내가 이러려고 호주 온 건데. 참 잘했다. 오버타임 더 안 하길 참 잘했다.


이제야 여유를 배웠다. 1년의 시간 동안 눈치만 봤던 그들의 문화에 이젠 내가 들어가 있다는 걸 느꼈고 참 많이 뿌듯했다. 이대로 쭉 여유 있는 그 문화를 배워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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