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친구랑 걷는다.
함께 걷는다는 것이 이렇게 좋다는 것을 잘 몰랐는데, 4일 차에 혼자서 걸어보니 쓸쓸한 길을 혼자서 걷는 것처럼 힘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생도 동반자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힘들 때 서로가 힘이 되는 것이다.
오늘은 황희 정승과 율곡선생과 관련된 길이다.
압구정은 조선시대 권신 한명회가 세운 정자 이름으로 중국 송나라의 승상 한충헌에 자신을 견주고 스스로 권력이나 부귀영화만을 탐내지 않았다는 평을 듣고 싶어 하여 한강을 건너 경치가 좋은 이곳에 갈매기와 친하다는 뜻의 자신의 호와 같은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반구정도 무엇인가 있다.
반구정은 조선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었던 황희(1363∼1452)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압구정은 한강 기슭에 세워졌으나 반구정은 임진강 기슭에 세워진 정자이다
반구정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이 건물은 황희가 죽은 후 조상을 추모하는 전국의 선비들이 유적지로 보호하여 오다가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고, 그 뒤 이 근처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시멘트로 개축을 하고 1975년에 단청과 축대를 보수하였다고 한다.
반구정을 옆으로 스치지만 이렇게 유서 있는 건물을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좀 아쉬워 입장료를 내고 반구정도 보고 황희 정승과 관련된 시설물도 본다. 주차장이 잘 되어 있어 여기에 주차를 시키고 이동을 하면 되는데 버스는 이곳으로 오지 않고 당동으로 지나가므로 이곳까지 걸어서 들어와야 한다. 먼길을 걷고 버스를 타고 온 후 다시 500m를 걷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리가 풀려서 그럴 수도 있고 근육이 이제는 에너지를 보충할 시간이 되었는데 갑자기 움직이라고 하니 근육이 거부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임진강으로 가기 전에 평양, 의주로 가는 기찻길이다. 전쟁 전에 이길로 기차가 다녔다고 한다. 장단역에 마지막으로 다니던 증기기관차가 있다고 한다. 그 기차가 이제는 임진각에 옮겨져서 전시 중에 있다. 이길로 언젠간 자유롭게 다니게 되면 우리도 이제는 섬이 아닌 대륙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대륙이 아닌 섬이 된 지금이 더 세계를 무대로 경제발전을 이루어 잘살게 되지 않았나 싶다. 세계로 진출한 국가들이 번영한 것처럼 우리들도 번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대륙으로부터 침탈이 없어진 것이 70년 이상 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임진강은 지금은 국제하천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지역에서 발원하여 남쪽의 필승교 지점에서 남방한계선을 통과한 후 군남댐에서 한차례 숨을 고르고 한탄강과 만나고 한강, 예성강과 합류한다. 필승교 상류지역의 북쪽에서 댐을 많이 만들고 물길을 예성강 쪽으로 물을 보내면 파주, 연전 지역은 물이 부족하게 되며 그곳에서 댐을 말없이 열면. 대응할 수 없어서 피해를 보게 된다. 이것이 현실이 되어 있다. 대화를 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피해를 보게 되어 군남 홍수 조절지댐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이 안타깝다.
임진각 옆을 거쳐서 임진강으로 이동을 한다. 평화누리길이 임진각을 거쳤으면 좀 더 좋았을 것이라고 본다. 임진각에 가면 남북 분단의 현실을 볼 수 있다.
자유의 다리도 있고 장단의 증기기관차도 있다
자유의 다리에 대하여 파주시는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 광장 앞 망배단 뒤편에 놓인 다리로 문산 시가지 북쪽 2km 부근에 있는데 임진강의 남과 북을 잇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원래 경의선 철교는 상ㆍ하행 2개의 교량이 있었으나 폭격으로 파괴되어 교각만 남아있던 것을 후에 전쟁 포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서쪽 교각 위에 철교를 복구했고 그 남쪽 끝에 임시 교량을 가설했고. 예전에는 노상리 쪽자 연 마을의 이름을 따서 독개다리라고 불렸으나 1953년에 공산군의 포로였던 12,773명의 국군과 유엔군이 자유를 찾아 귀환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임진강변 생태탐방로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제한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운영 여부를 반드시 확인하여야 한다.
임진각 변 생태 탐방로에 대하여 파주시가 소개하기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통일대교, 초평도, 임진나루를 지나 율곡습지공원까지 이어지는 9.1km의 구간으로 약 3시간이 소요되는 코스이며,. 철책이 설치되고, 민간인을 통제하던 순찰로로 활용되었던 곳으로 임진강을 따라 걷는 생태탐방로 구간으로 일반인에게도 허락되었으며 출입절차와 시간 및 인원의 제한 등 절차상의 번거로움이 있지만 외부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라 탐방객들에게는 신선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한다.
생태탐방로에서는 재두루미, 독수리, 쇠기러기 등 겨울철새가 월동하는 ‘초평도’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철새에 대하여 잘 모르고 접근을 하는데 임진각을 지나고 철도를 건너서 임진강변 가까이에 있는 논을 지나는데 논에서 떨어진 곡식류를 사냥하던 날아오른다. 수백 마리가 동시에 이륙하니 헬기가 이룩하는 것 같이 웅장한 소리가 난다. 멀리서 관찰하여야 하는데 너무 가까이 접근이 된 것이다 김포 들녘 보다 철새가 많다. 기러기가 하늘을 나는 것이 가능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율곡선생 하면 강릉 오죽헌만 생각하는데 오죽헌은 율곡선생이 어릴 적 어머니인 신사임당과 같이 보낸 곳이고 성인이 된 후 율곡선생이 보낸 곳이 어디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이곳을 가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율곡리다.
임진나루터가 있다. 선조가 이곳을 통해 건넜다.
임진리의 임진나루 터는 한양에서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중요한 나루였으므로 나라에서는 이곳에 임진진을 두었다. 임진왜란 때는 방어사 신할이 조방장(助防將) 유극량의 권고를 무시한 채 이 나루를 건너가 왜적과 싸우다 두 사람 모두 죽어 조선군이 참패하기도 하였다. 한편 병자호란 때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이 강을 건너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임진나루터 옆에 화석정이 있다. 화석정과 관련된 한시가 있어 옮겨 보있다. 임진강 8경 중에 하나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花石亭春 화석정춘 : 화석정의 봄(호곡 남용익(壺谷 南龍翼))
화석정에 새로핀 꽃을花石亭前花事新
홀로 감상하는 나그네獨來昑賞有閒人
유방을 온세상이 알지 못하니幽旁擧世無相識
탄식한들 선생(율곡)이 가신 뒤 봄이라네可惜先生去後春
화석정은 율곡리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자리 잡은 조선시대 양식의 정자로 정면 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초익공(初翼工) 형태로서 정자에 서면 바로 밑을 흐르는 임진강을 굽어볼 수 있어 나도 쳐다보았다.
파주에서 설명하기를 이 곳 화석정 자리는 고려 말 대유학자인 길재(吉再)의 유지(遺址)였던 자리라고 전해지나 확인할 수는 없다고 한다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10만 양병설을 주 장한이 이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한밤중에 강을 건널 때 이 정자를 태워 불을 밝혔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현재의 정자는 율곡선생의 후손들이 복원한 정자가 한국전쟁 중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에 대하여 저술한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화석정 소각설과 다르게 임진나루에 있는 승정 건물을 헐어 목재를 불태워 뱃길을 밝히고 왜군이 뗏목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기술해 있어 지금도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본다, 선조가 임진강을 건널 때 비가 많이 와서 2 곳다 불에 태우지 않았나 생각된다.
율곡습지공원을 지나 파평면을 지난다.
윤씨하면 파평윤씨가 대부분이다. 이 파평면이 파평윤씨가 이곳에 본관을 두고 있다. 파평 윤씨의 시조에 얽힌 얘기가 전해온다. 신라 말에 한 노인이 용연(龍涎)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이상한 빛이 한 줄기 비치면서 궤짝이 나타났다. 노인이 그 궤를 가져다 열어보니 옥동자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데려다 키웠는데, 그가 바로 고려 때 정 1품 벼슬인 태사를 지낸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이었다. 윤신달의 현손인 윤관은 여진족을 물리쳤고, 그의 아들이 김부식, 정지상과 함께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윤언이(尹彦頤)다. 평화누리길은 파평윤씨의 전설이 있는 용연을 지나지 않고 파평중학교를 거쳐 임진강변으로 간다. 평화누리길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임진강 적벽이 시작된다. 11코스에서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고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다만. 이제는 지질공원에 감탄만 할 일이 있다. 임진강의 주상절리 위에 마련된 적벽 산책로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60만 년 전 신생대 철원 일대에서 분출된 용암이 만들어 준 풍광으로 선조 역시 뱃놀이를 즐겼을 정도로 그 아름다움에 탄복이 절로 난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겨울에 걷는 것은 적당한 시간까지 걸어야 한다. 그리고 그 걷는 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지점을 정확히 확인하고 그곳에서 멈추어야 한다. 하루에 6시간에서 7시간 정도만 걷고 시내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곳에서 멈추기로 하였다. 문산읍까지 버스를 타고 간 후 다시 문산읍에서 반구정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버스를 타는 시간도 계산하여야 하기 때문에 16시경 종료하였다. 9코스의 나머지 구산과 10코스를 다음으로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