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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업하는 건물주 Nov 16. 2024

저의 간택을 받아주세요!

2024.10.11(금)



흔들흔들,

세상의 움직임이 저의 잠을 깨우기 시작해요.


웅성웅성,

조용하던 세상이 소란스러워졌어요.


반짝반짝,

햇살이 저의 온몸으로 스며들어요.


아이, 따뜻해.

살포시 눈을 떠요.


"깼다! 깼다!"


많은 눈들이 저를 바라보고 있어요.

낯익은 얼굴도 보여요.

어제 저와 놀아준 아이들은 없어요.

기지개를 쭉 켜고 상자 밖으로 점프해서 나왔어요.

햇살이 정말 좋아요.

이 햇살을 더 만끽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저보고 귀엽다며 쓰다듬어줘요.

이 손길도 엄마 같이 포근해서 좋아요.

얌전히 앉아 예쁨을 받아요.

어떤 분이 저의 눈곱을 떼어주고 제 몸을 들어 요리조리 확인해요.

저더러 암컷이래요.

수컷인데.


갑자기 모든 게 귀찮고 거슬려요.

사람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걸어 나와요.

어디로 갈까?

저기 자동차 밑이 좋겠어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이곳에 멀뚱히 섰어요.


"이리 와, 여기 여기."


손뼉 치고 혀를 찬 뒤 두 팔을 벌려요.

다른 곳을 보며 외면해요.

한 명 두 명 떠나가는가 싶더니 아저씨가 저에게 음식을 내밀어요.

손을 뻗어 저를 잡으려 하지만 자동차 밑이라 손이 닿지 않아요.

음식을 두고 아저씨도 떠났어요.


천천히 몸을 움직여요.

건물 벽이 보여요.

푸른 풀 앞으로 걸어가 향기를 맡아요.

향긋해요.

맛있는 냄새도 나요.

냄새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제 옆에 음식이 있고 멀찍이 아주머니가 앉아 있어요.

분명히 음식은 뒤쪽에 있었는데 다시 가지고 왔나 봐요.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져요.

그때 아주머니가 다가와 제 발 앞에 음식을 두고 다시 멀리 떨어져 쪼그리고 앉아 있어요.


꼬르륵,

오랜 시간 잠만 잤더니 배가 몹시 고파요.

허겁지겁 먹기 시작해요.

살짝 짰지만 정말 맛있는 참치예요.


제가 언제 다 먹은 거죠?

정신 차리고 보니 그릇을 핥고 있어요. 

얼마나 핥았으면 그릇에 햇빛이 반사돼 반짝여요.

다른 칸에는 물도 있어요.

홀짝홀짝,

꿀맛이란 이런 걸까요?

물에 혀를 적셔마시니 홀쭉하던 배가 복어처럼 빵빵해졌어요.


먹는 내내 나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주던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쳐요.

나를 향해 웃고 있어요.

이 사람이라면 믿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쪼그려 앉은 아주머니의 몸에 나의 몸을 접촉하며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아요.

멈춰 서서 아주머니 몸에 제 몸을 기대요.


'당신이 제일 믿음이 가요. 저의 간택을 받아주세요.'


제 몸을 쓰다듬어주는 아주머니.

기분이 좋아 그대로 바닥에 누운 뒤 제 배를 보여주며 아주머니를 쳐다봤어요.

역시나 저를 보며 웃고 있어요.

배부르고, 햇볕 좋고, 간택도 받아주니 잠이 솔솔 와요.

바닥에 엎드려 한숨 더 자야겠어요.

살포시 눈을 감아요.


어?

그런데 갑자기 저를 안고 어디론가 이동해요.

어디로 가는 걸까요?


으악!

자고 일어났던 상자 안에 다시 저를 넣어요.

왜 이러는 걸까요?

어두운 상자보다 햇살이 내리쬐는 바깥이 좋아요.

밖으로 나오려는데 뻥 뚫린 천정을 물건으로 막았어요.

햇살이 들어오는 작은 구멍으로 밖을 보니 아주머니가 있어요.


"미안해, 답답하겠지만 일 끝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줘. 밖은 차가 많아서 굉장히 위험해. 알았지?"


저는 상자 안이 더 답답하고 불편하단 말이에요.

제 간택이 잘못된 걸까요?

분명히 재워주고 밥도 줬는데...

믿을만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어둡고 좁은 상자 안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일단 엎드려요.

엎드리니 잠은 또 와요.

아까 자려던 잠을 상자 안에서 다시 청해봐야겠어요.

생각보다 빨리 잠이 들어요.

쿨쿨쿨




아함, 잘 잤다!

그런데 여기는 또 어디지?



자고 일어나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어요.

하늘은 파랗고 구름을 하얗고 나머지는 온통 초록색인 세상.

주위를 살펴보니 간택을 받아준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앉아 있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요.

걷다 보니 어떤 구조인지 파악되었어요.

양달 구석 자리가 마음에 들어요. 

앉아봤어요. 

햇살이 너무 강해 생각보다 별로예요.

다시 일어나 걸으며 누울 자리를 찾아요.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는 응달에 누워요.

살포시 눈도 감아요. 

많이 잔 덕분에 잠은 오지 않지만 상자 안 보다 공기가 신선해서 자연을 음미해요.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문득 아주머니가 잘 계신지 궁금해 일어나 한 번 찾아봐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어요.

나는 다른 자리를 찾아 다시 엎드려요.

잠시 엎드린다는 게 저도 모르게 또 잠들었나 봐요.

복도에서 울리는 꼬마의 우렁찬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거든요.

문이 열리더니 초록세상으로 꼬마가 들어와요.

두리번거려요.

나와 눈이 마주쳐요.

나에게 다가와요.


두근두근


꼬마는 엉덩이를 털썩 붙이고 바닥에 앉아 나를 끌어안아요.

내가 보고 싶었다고 말해요.

내가 귀여운지 연신 쓰다듬어요.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만져주니 배려심이 느껴져요.


갑자기 아주머니와 꼬마가 일어나요.

나를 품에 안은채 초록세상을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가요.

또 어디로 가는 걸까요?

익숙해질 때쯤 또 다른 일이 벌어지니 안심할 틈이 없어요.


앗!

생각과 달리 익숙한 곳에 왔어요.

음식을 먹었던 그 장소예요.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소녀도 있어요.

소녀의 친구들도 많이 있어요.

꼬마와 소녀와 소녀의 친구들과 함께 놀 건가 봐요.

소녀는 나를 안고 공원으로 이동해요.

공원에서 다 함께 노느라 신나면서도 피곤해요.

혼자 있으면 같이 어울리고 싶고, 같이 어울리면 혼자 있고 싶은

알 수 없는 제 마음.


시간이 꽤 흘렀는지 해가 늬엇늬엇 지기 시작했어요.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을 뒤로 한채

소녀와 친구들은 서로 인사를 나눈 후 헤어져요.

소녀는 저를 안고 집으로 가요.

음식이 준비되어 있어 밥도 맛있게 먹어요.


멀리서부터 걸어오던 학생이 저를 반갑게 맞이해요.

이 학생도 저에게 예쁘다고 말해요.


이렇게 예쁜 저를 엄마는 왜 찾지 않는 걸까요?


생각이 깊어지려던 찰나에 갑자기 사람들이 모두 분주해졌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싸고 조명도 하나씩 꺼지고 있어요.

아주머니는 저와 상자를 안고 화장실로 이동해요.

제가 싫어하는 그 상자에 저를 넣어요.

상자 옆에는 음식과 물이 담겨 있어요.

저는 여기서 자고 싶지도, 먹고 싶지도 않은데 자꾸 자라고 해요.

아이들도 저와 함께 있고 싶다 하는데 아주머니는 우리를 갈라놓으려 해요.

힘껏 점프해 상자 밖으로 탈출해요.

아주머니는 그런 저를 잡고 다시 상자 안에 넣어요.

또 탈출해요.

다시 상자 안으로 넣어요.

그리고 재빨리 불을 끄고 문을 닫아 버렸어요.


상자 위로 올라가 열심히 외쳤어요.

두려워요!

외로워요!

저를 혼자 두지 말아요!

이럴 거면 밖에 혼자 두지 왜 가두는 거예요?

큰 소리로 "야옹~"이라고 외쳐보지만 "에엥~" 소리만 작게 나올 뿐이에요.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려요.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불빛이 점점 커지면서 형체가 보여요.

제가 좋아하는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은 불을 켜고 제 곁으로 다가와 저를 안아주고 만져줬어요.

돌아와 준 아이들이 고마웠어요.

정말 고마웠어요.


그 뒤로도 한참을 놀아준 아이들.

이 아이들 중에서 다시 간택을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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